[PRESS] 느린 삶을 지향하는 페스티벌 -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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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돗자리에 누워 한강 작가의 책을 다시 읽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식으로 전국이 들썩인다.
책 산업이 침체된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들려왔고, 책이 아니더라도 볼만한 콘텐츠가 너무 많은 세상이 되었다. 최근에 ‘텍스트 힙’이라는 일종의 독서 인증 열풍이 불기도 했지만 그 열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생각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국내와 해외를 포함한 대부분이 예상하지 못하던 시점에 들려온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너무도 반가운 일이다.
한강 작가의 책은 연일 매진으로 구하기조차 쉽지가 않다. 100만부가 팔리며 우리나라 대표 출판사 중 하나인 민음사의 2023년 한 해 매출에 필적하는 규모의 실적을 한 명의 작가가 견인하고 있다는 기사도 나온다. 한 명의 작가가 이 정도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우리나라가 한강 보유국이라 행복하다는 일명 ‘주접’도 여기저기에 올라오고 있다.
오래 전부터 한강의 팬이었던지라 다행히 집에 몇 권의 책이 남아있었다. 부커상 수상 당시 구매했던 <채식주의자>나 수업에서 분석해서 글을 쓰고 발표했던 <소년이온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자주 꺼내봤던 <흰>을 비롯한 몇 권의 책을 책장에서 꺼내 먼지를 털었다. 개인적으로는 한강 작가의 시를 더 좋아하는데 시집을 누구에게 빌려주었는지 찾지는 못 했다.
책을 몇 권 들고, 지난 주말 올림픽 공원을 찾았다.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 2024가 열리고 있는 장소였다. 입장해서 돗자리를 깔고 냅다 드러누웠다. 가을이라고 선선한 바람이 반겨주고 있었다. 하늘은 높고 맑았고 시야에는 무대가 펼쳐져 있었다. 무대 너머에는 잠실타워가 보였다. 적당히 북적이는 사람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고 음식과 맥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쾌적한 환경에서 휴식을 취하다보면 아티스트의 순서가 하나씩 찾아왔다. 스탠딩존도 마련되어 있었지만 올림픽 공원은 어느 위치에서도 시야가 좋은 편이라 몇 번을 제외하고는 굳이 나가지 않았다. 무대에 시선을 고정해놓고 멍하니 생각에 잠기거나 책을 읽었다. 별 거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시 멀어져가고, 맥주 한 모금과 친구와의 대화 그리고 집에서 챙겨온 샤인머스캣으로 시간을 보냈다.
느린 삶을 지향하는 페스티벌 –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 2024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 2024는 지난 10월 11일 금요일부터 13일 일요일까지 3일에 걸쳐 88올림픽공원 잔디마당에서 진행됐다. 팬들에게 ‘슬라슬라’라는 이름으로 자주 불리는 이 행사는 느리게 살아가는 삶을 지향하는 페스티벌이라는 컨셉을 가지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대표 페스티벌이자 재즈 행사인 서울재즈페스티벌을 운영하는 프라이빗커브에서 주최하고 있어 매끄러운 행사 진행을 기대할 수 있다.
슬라슬라가 진행되는 88올림픽공원 잔디마당은 페스티벌을 진행하기에 적합한 장소이다. 페스티벌이 이뤄지는 각각의 장소들이 다른 매력을 가지긴 하지만, 이곳은 특히나 페스티벌다운 정석적인 피크닉을 즐기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생각한다. 내부로 들어가면 적당히 넓고 한적한 독립된 공간이 있고, 어디서든 무대를 놓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하며, 특유의 개방감과 안락함을 느낄 수 있다.
인근 체조경기장이나 핸드볼경기장에서도 많은 행사가 진행되는 만큼 주차 공간도 넉넉한 편이고 올림픽 광장에 카페와 편의점 등 편의시설도 여럿 자리하고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우 역에서 내려서 광장을 따라 쭉 걸으면 되기 때문에 길을 찾기에도 어렵지 않다.
해가 지고나면 저 멀리 보이는 잠실타워가 다양한 빛으로 반짝이면서 분위기를 내주고, 귀가하는 길도 빠르고 쾌적하다. 그래서 올림픽공원 잔디마당에서 진행되는 페스티벌에 참여할 때는 크게 부담이 없다. 돗자리 한 장에 책 한 권 들고 오면 하루종일 편하고 안락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느린 삶을 지향하는 슬라슬라에 가장 적합한 공간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공연 진행에도 이런 특징이 드러났다. 요즘은 무대 사이의 대기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전환 시간을 최소한으로 잡거나, 아예 무대를 여러개 운영해서 한 공연이 끝나는 동시에 다음 순서로 이어지도록 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분명 장점이 있는 방식이다.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고, 밀도 있게 행사가 진행되다보니 충실하게 시간을 사용하는 느낌이 들고 많은 공연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계속되는 공연에 피로하거나 힘든 경우도 있다.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연속으로 나오면 화장실 타이밍이나 식사 타이밍에 대한 고민도 필수적으로 하게 된다.
반면에 슬라슬라는 아티스트 공연 사이에 한 시간 가량의 대기시간을 비워두는 선택을 했다. 최근 밀도있게 운영되는 페스티벌에 익숙해지다보니 처음에는 대기시간이 긴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지루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무대 전환 시간동안 여유롭게 책을 읽고 무언가를 먹으며 쉬고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어 편하게 느껴진 부분도 있었다.
대부분의 페스티벌에서 초반부에 공연하는 아티스트에게는 짧은 공연시간이 주어지고 후반부로 갈수록 많은 시간이 부여되어서 아쉬움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슬라슬라에서는 모든 아티스트에게 최소 60분, 최대 90분 가량의 충분하고 넉넉한 무대를 보여주었다. 때문에 대기시간이 있더라도 공연을 충분히 즐겼다고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올해 라인업도 재밌게 구성이 되었다. 금요일에는 오드리 누나, 예지, 페기 구가 공연을 올렸다. 그야말로 불금에 걸맞는 라인업이었다. 오드리 누나와 예지는 작은 몸으로 무대에 올라 파격적인 퍼포먼스와 음악으로 공간을 채워주었고, 페기 구는 직접 라이브 디제잉을 진행하며 다같이 리듬을 타고 춤출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디제이라서 그런지 이 날 많은 외국인이 행사장을 찾았다.
토요일에는 바밍타이거, 하드 라이프, 실리카겔, 럭키 데이, 조지가 무대를 했고, 일요일에는 정세운, 클레어 로신크란츠, 글렌케츠, 코린 베일리 레, 혼네가 즐거운 페스티벌을 만들어주었다. 페스티벌하면 빠질 수 없는 실리카겔이나 글렌체크 같은 아티스트는 물론, 다른 페스티벌에서 보기 어려운 코린 베일리 레, 클레어 로신크란츠, 조지 등 매력적인 라인업을 선보였다.
올해에만 벌써 10개가 조금 안 되는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각각의 매력이 전부 달라서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지만, 피크닉에만 주안점을 둔다면 개인적으로 선선한 날씨에 올림픽공원에서 진행되는 슬라슬라에 한 표를 주고싶다. 페스티벌이 주는 비일상성을 포근하게 체험할 수 있는 행사이다.
슬라슬라는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의 한복판에서 잠시 들렀다 갈 수 있는 안락한 휴식 같은 경험으로 기억될 것 같다. 수많은 아티스트를 밀도있게 만나볼 수 있는 페스티벌도 좋지만, 지친 마음을 쉬어갈 수 있는 여유로운 슬라슬라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 2024’가 내년에도 이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느리고 행복한 삶(슬로우 라이프)가 공연장 밖에도 모두에게 이어지길 함께 바라본다.
[김인규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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