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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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다른 우주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내가 있다면
인간은 어떠한 희망 속에서 삶을 살아가야 할까
2014년 초연되었던 이여진 작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이제 우리 연극무대에서도 낯설지 않은 'SF 연극'이자 '과학연극'이다. 물리학을 통해 우주의 생성과정과 신화를 설명하려는 물리학도 차연과 기억을 잃고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려는 늙은 노파. 이 둘의 시공간은 마치 서로가 서로의 꿈인 듯, 혹은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는 평행우주인 듯, 병렬되며 중첩된다. SF를 소재로하는 작품은 많아지고 있지만 작품의 구성 자체가 긴밀하게 현대과학 이론을 제대로 녹여낸 창작품은 드문 이즈음,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본격적인 'SF 연극'의 전범이 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평생 동안 욕망을 실현해나가며 분투하지만, 결국 그 욕망의 정거장에서 미끄러져 소진되고, 빈 껍데기(기표)로 남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한 희망 속에서 삶을 살아가야 할까.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고아 같은 삶을 살던 주인공 차연. 그녀는 생전의 아인슈타인처럼 '단 한 줄의 방정식으로 우주를 설명'하고자 하는 물리학도가 되고자 분투한다. 그러나 무대 반대쪽에서는 기억을 잃고 경찰서에 쓰러져 누워 자는 노파가 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군지 설명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렇듯 물리학도로서 자신을 입증하려는 차연의 삶과 기억을 찾고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파의 상황은 교차되고 점점 얽힌다. 그들은 '평행우주 속의 또 다른 나'일까 아니면 '꿈속의 나 자신'일까.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평행우주 속 또 다른 '나'와의 만남/긴밀한 얽힘 관계(양자역학 용어)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인간의 존재에게 있어서 욕망의 성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존의 수용임'을 그리고 있다.
[세 개의 삶의 공간, 세 개의 우주] - 극 중에는 1. 차연과 노파의 시공간 - '양자얽힘'을 논문 주제로 택한 차연과 선배 기혁, 그리고 야광버섯 동호회의 앙꼬와 단호박이 사는 세계/기억을 잃고 경찰서 지구대에 와 있는 노파의 세계 2. 야광버섯산 주인인 서회장의 무의식의 시공간 –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서회장은 야광버섯 서식지를 지키며 숫자를 센다 3. 또 다른 우주의 차연의 시공간 – 마지막 장면, 변수만 파악되면 또 다른 우주를 찾을 수 있다고 믿으며 여전히 물리학을 파고드는 차연의 세계 등 '세 개의 공간과 우주'가 존재한다. 극은 이 셋이 얽혀들고 교차하면서 빠르게 전개된다. 이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듯도 하고 작품 제목에서처럼 '꿈'이나 무의식의 세계에 존재하는 듯도 보이지만, 또 다른 우주(다중우주)에 존재하는 사람들로 서로의 삶과 존재에 힘이 되어준다.
[주변부가 아닌 주체, '여성의 실존'을 말하는 연극] - "주변부가 아닌 자길 기억해야 해요. 뭔가 계속 기억하려는 나 자신, 주체!" 기억을 잃은 가운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노파는 이 대사를 반복한다. 차연 또한 극중 이 대사를 곱씹는다. 차연은 실존적 위협의 상황에서 생존력과 실행력, 협상력을 발휘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과정은 젠더 불평등에 대한 분노의 정동을 넘어서 여성의 실존 문제를 통해 인식적 지평을 넓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업이다.
[정교한 과학이론의 차용을 통한 작품화, 하드 SF 장르의 작품] - 물리학 이론이 우리와 먼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는 인간 삶의 우연성과 '예측불가'성을 설명하는 데 필수불가결해졌다.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의 인물들은 이 예측불가한 삶 속에서 고군분투한다.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파동/입자의 관계, 양자얽힘, 슈레딩거의 고양이, 우주생성 과정 등 양자역학 이론을 깊이 있게 적용하여 극을 치밀하게 구성한 한다는 점에서 분류하자면 '하드 SF' 장르에 속하는 작품이다. SF는 스페이스 오페라, 디스토피아, 밀리터리 등 다양한 하위 장르가 존재한다. 이러한 하위 장르의 구체화는 현실의 모순을 포착할 수 있는 문학적 상징성 및 치밀한 알레고리를 구축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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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여진 - 2012 신춘문예 당선 이후, SF와 판타지 등을 통해 사회문제와 인간 실존의 문제에 천착해왔다. / [소녀-프랑켄슈타인], [트라우마 수리공], [살인자의 수트케이스], [토일릿 피플]
연출 이여진x김종우(구르는돌 프로젝트) - 이여진은 2012년부터 작가로 활동했으며, 2024년부터 연출을 겸하며 활동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김종우는 다큐멘터리와 픽션, 극장의 안과 밖을 탐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모-레], [둘, 셋 산책]을 연출한 바 있다.
[박형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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