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광주 비엔날레를 관람했다.
《판소리: 모두의 울림》이라는 제목으로 9월 7일부터 12월 1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사실 내 흥미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사전 지식 없이 처음 마주하는 그대로 작품들을 느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타이틀 이상의 자세한 조사는 하지 않고 기대 없이 광주로 향했는데, 결과적으로 이 관람은 스스로에게 새로운 느낌과 영감들을 많이 선사하는 기회가 되었다. 분주한 학기 중 소중한 예술 향유의 시간이자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솔직하게, 전시를 보며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난해하다’였다. 대부분의 전시회가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운 형태로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최근 봤던 적지 않은 전시 중에서도 손에 꼽히게 해석이 어려운 작품들의 연속이었다. 그림은 물론, 크고 작은 조형물들까지 어떤 의도로 만들어진 것일지 한참을 바라보며 고민하게 되었다. 곧바로 이해되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러한 태도에서 벗어나 처음 먹었던 마음대로 작품 자체를 느끼려 노력했을 때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먼저 ‘판소리’라는 주제가 독특하게 다가왔다. 하나의 문학 장르이기도, 우리나라의 고유한 문화이기도 한 판소리. 그러나 정말 ‘판소리’의 역사나 형식만을 고리타분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소리’라는 두 필수적 요소를 이용하여 그 안에서 세상에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를 발견한 것이, 또한 이토록 다양한 형태로 표현한 것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판소리가 어떠한 음악 장르이기 전에 ‘서민의 목소리’를 담은 양식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한 가지 더 놀랐던 것은, 외국 작가들의 참여 비율이었다. 판소리라는 주제를 처음 바라보았을 때는 당연히도 이 단어가 익숙한 국내 작가들이 주로 참여한 전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외국 작가들이 세계의 다양한 문제 상황에 ‘공간’과 ‘소리’를 적용하여 자신들만의 예술로 판소리를 해석한 것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섹션은 ‘처음 소리’ 전시장이었다. 이 섹션에서는 우주 공간 등 광활한 세계를 탐구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계속 느끼고 있었던 ‘난해함’, ‘모호함’이 가장 짙게 드러난 전시장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한 영상 작품에 마음을 빼앗겼다. 마치 현미경으로 어떠한 생물을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환상적인 우주를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한 희미한 영상에 자막이 삽입된 작품이었다.
이 자막에는 작가의 작품세계가 반영되어 있었다. 모든 이야기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추상적이고 난해한 세계에서 작가의 고유한 특성, 즉 스며든 물방울 하나가 그 어떤 존재보다 오래 남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작품에 담겨진 작가의 생각, 즉 철학은 아마도 단일하고 복잡한 세계에서 자신들만의 개성적인 색을 잃지 말고 세계로 전진하라는 조언이었을 것이다. 이 메시지에 비추어 시대를 바라보았을 때, 느껴지는 것이 많았다.
지금의 세상은 예술의 가치를 쉽게 폄하한다. 남들과 다른 길, 좁은 길로 가는 이들을 보았을 때 응원과 격려보다 손가락질하는 일이 빈번하다. 이 영상물을 만든 작가도 그런 시선들에 상처받고 움츠러들었던 적이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작가는 ‘그래서 나는 암흑물질에 삼켜진 밤하늘의 별자리를 좇았다, 불확실성에서 불확실성으로’라고 말한다. 분명하지 않고, 보장되지 않았음에도 기꺼이 그 길로 걸어가는 것. 동경하는 세상을 향해 내가 가진 빛들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것. 이 작품을 통해 그런 ’도전하는 예술‘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만약 이 영상물을 내가 큐레이팅한다면, 영상의 자막 전체 분량을 스크립트 형식으로 제작하여 옆에 붙여두었을 것 같다. 영상 전시의 특성상 전체를 다 시청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관람객들이 많은데, 이 작품의 자막은 한 문장 한 문장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기에 사람들이 꼭 한 번씩 전문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판소리: 모두의 울림》에서 바라본 모든 작품들을 언급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이 전시를 관람하면서 난해함과 모호함이 예술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시선을 두는 것만으로 이해되는 작품들은 분명히 설득력이 있으나 금세 소화되어 버릴 것이다.
일상의 흘러가는 한 장면으로 인식하고, 예술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난해함이라는 특이하고 불편한 요소가 한 스푼 추가되었을 때 우리는 그 특성을 끝없이 탐구하게 된다. 왜 이런 모양이 되었을지, 왜 이런 이야기를 가지게 되었을지를 세세하게 읽어내려 노력한다. 그 모든 과정이 결국 예술을 체험하는 순간이 된다.
어쩌면 모호함은 가장 선명한 생각의 출력을 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깨달음을 얻은 것만으로 이 전시의 관람은 내게 충분히 의미 있었던 시간이었다. 큐레이션을 계속해서 배우고, 앞으로 다양한 예술을 만날 때에 내가 열린 시각으로 그 모든 공간과 소리의 난해함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 어쩌면, 판소리라는 주제가 주고 싶었던 울림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