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는 높고 거대한 산과 같아서 정상에 이르는 길은 여럿이다.
- 작가의 말
미술계는 나와 거리가 있는 산업으로 치부되는 영역이다. 일단 현대 미술은 난해하다. 물론 책에 소개된 앤디 워홀처럼 대중 친화적인 소재와 접근법을 추구하는 작가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림만 봤을 때 쉽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힘들다. 거기에다 소위 ‘그림값’이 천문학적으로 비싸다. 돈의 단위가 너무 차이가 나니까 심리적 거리감이 더 생기고, 실제로 물리적인 거리감도 존재하고, 그러니 ‘그들만의 영역’으로 치부하고 이해하길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림값 미술사>는 나 같은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책이다. 일단 ‘미술사’가 아니라 ‘그림값 미술사’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왜 이렇게 미술은 비싼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해소해 준다. 많은 사람이 처음에 진입장벽으로 여기는 그림값의 이유에 대해 소개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미술작품과 역사를 엮어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친절하고 알찬 구성이다. 전반적인 미술 산업에 대한 이해는 물론, 유명한 미술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는 책이었다.
프리미엄의 요행
이 책에서 제시하는 그림값이 비싼 이유는 총 아홉 가지이다. VIP의 소장 여부, 희귀성, 미술사적 가치, 스타 화가의 사연, 콜렉터의 특별한 취향, 투자 세력, 구매자의 경쟁심, 뜻밖의 행운, 명작을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책을 완독하고 나서 떠오른 생각은, 이 중 한 가지 요인으로만 그림값이 정해지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VIP가 소장하는 이유는 명예로워서일 것이고, 명예롭다는 것은 미술사적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귀하다는 것이고, 귀하다는 것은 희귀한 것이고…….
VIP의 소장작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마치 부동산 중개인이 집을 보여줄 때 “여기 누가 사셨는지 아시죠? ○○○ 님 집이었잖아요.”라는 말을 통해 평범한 집을 비범한 공간으로 느끼게끔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것이 결국 ‘프리미엄’이라는 돈으로 귀결시키는 것까지. 실제로 앙리 마티스의 <뻐꾸기들, 푸른색과 분홍색 양탄자>는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의 컬렉션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림의 가치가 올랐다. 특히 이브 생 로랑이 생전에 자신의 소장작들을 딱 한 번 공개했는데, 700점이 넘는 소장작 가운데 이 그림 앞에서 사진을 찍었기에, 이 작품을 컬렉션의 대표작으로 여겼고, 소장작들 중 최고 경매가를 기록했다고 한다.
다른 작품의 값이 오르면 같이 값이 오르는 작가의 작품도 있다고 한다. 그 작가의 주인공은 바로 마네. 마네는 르네상스에 확립되어 이어져 오던 고전 미술의 양식을 무시했다. 원근법을 부정하고, 그림의 연극성을 부정하고, 그림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라는 전통을 부정했다. 원근법을 무시해 보이는 대로 그렸고, 그렇기에 그림을 보는 관람객의 시선을 유동적으로 만들며 연극성을 부정했다. 그림을 그대로 바라보는 방식으로 ‘조형미’를 강조했기에, 이야기를 실감 나게 표현하는 ‘재현미’가 중요했던 과거의 전통을 부정했다.
자유로운 필치, 색채의 조화, 안료의 질감 등을 부각한 마네의 붓질에서 인상주의는 시작되었다. 그러니 인상주의 작품들의 값이 오르면 자연스레 마네의 그림값도 높아지는 것이다. 사실 마네는 사후에 더 명예와 지위가 높아진 작가이다. 조형미의 길을 후배 화가들이 따라 걸었기에 선구자가 된 것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수련> 시리즈와 <인상, 해돋이>를 그린 클로드 모네가 없었다면 마네의 그림은 이렇게 높이 평가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네의 인상주의를 잇되, 마네가 하지 않은 새로운 시도를 도전하는 모네를 통해 인상주의의 명성이 드높아졌다.
잔인함과 낭만의 공존
작전 세력으로 그림값이 오른 사례도 있다.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은 2004년 경매에서 미술 경매 역사상 최초로 1억 달러를 돌파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의 타이틀을 가졌고, 피카소의 이름값은 더욱 높아졌다. 물론 피카소는 생전에도 이미 미술사에서 자리를 차지한 거장이자 대중 스타였지만, 경매의 구매자가 밝혀지지 않은 점 등 낙찰 직후 제기된 내부 거래 의혹은 타당하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일단 어떤 작가의 작품 가격이 오르면 그 사실이 작가의 명성을 높이고, 높은 명성을 지닌 작가의 작품은 거래가 될수록 다시 가격이 오르기 때문이다. 즉 작가의 명성과 작품 가격의 상승이란 선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p226
잭슨 폴록의 그림 역시 국가 권력의 개입으로 인해 가치가 올랐다. 잭슨 폴록의 <넘버 12, 1949>는 2004년 경매에서 피카소 작품보다 비싼 1억 1,650만 달러(약 1,510억 원)에 팔렸다. 어떻게 그만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나? 폴록은 넓은 캔버스에 질서와 규칙은 없고, 색의 자유로운 움직임만 가득한 추상표현주의의 작품을 내놓았다. 미국은 ‘새로운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자유로운 영혼의 미국인’ 폴록을 통해 자유롭고 진보적인 미국의 이미지를 가지고자 했고, 중앙정보부의 개입으로 폴록을 의도적으로 띄우기 위해 공작했다. 즉, 폴록의 작품은 국가 권력에 의한 선전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그림값’이 존재하는 예술은 참으로 비합리적인 것 같다. 노력에 의한 부분보다는 운에 의한 부분이 많은 것 같고, 개인 노력의 범위에 벗어난 많은 부분의 상호작용으로 그림값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가난할 때 가장 좋은 작품이 나오기에 예술은 잔인하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렇다면 그러나 부유함을 결정짓는 요소를 알 수 없다는 점이 예술의 더 잔인한 부분 아닐까? 이렇게 그림값에 대한 책을 읽어도 여전히 값을 매기는 결정적인 요소를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잔인함이 있듯이 예술의 낭만성도 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는 사는 동안은 완전히 무명이었는데 사후 200여 년이 흐른 후 스타가 되었다. 미술사 연구를 하던 윌리엄 비르거에 의해 “전기도 없고 작품은 희귀하기만 한 위대한 한 화가”의 작품이 발견된 것이다. 후에 그는 옛 거장의 작품을 모은 전시회에서 페르메이르의 작품 11점을 선보였고, “렘브란트처럼 물감을 다루고, 피터르 더 호흐처럼 빛과 효과를 즐긴다”고 거장과 결부시키며 위대한 화가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루브르 박물관에서 <레이스를 짜는 여인>을 구매하며, 페르메이르의 그림값은 고공 행진을 이루었다.
창조의 정량화
개인적으로 그나마 아는 미술가가 있다면 에드워드 호퍼였다.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주제로 쓴 단편 소설인 최정나 작가의 ‘한밤의 손님들’을 분석하며 그림을 깊게 닳도록 바라보기도 했고, 에드워드 호퍼의 분명하고 깔끔하지만 쓸쓸한 느낌을 주는 색감과 방식을 좋아했다. 그런데 에드워드 호퍼가 ‘뉴욕의 페르메이르’라고 불린다니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미술 분석사의 어쩌면 ‘팬심’으로 시작되어 발굴된 페르메이르의 일화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는데, 호퍼까지 닿아있다니, 어쩌면 미술에 대한 연결고리를 더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작은 우리를 압도한다. '저것 때문이다'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을만큼 전체가 하나의 분위기로 수렴된 듯한 힘을 느낀다. 그것을 달리 부르면 창조성이다.
p78
미술은 거의 알지 못하는 분야였고, 그랬기에 정말 유익한 책이었다. 본디 지식을 전달하고 전문성을 띠는 ‘책’이라는 플랫폼에 아주 적합한 작품이었달까. 특히 수많은 예술 작품이 같이 실려 있었기에, 지식적인 측면과 아울러 시각적으로도 많이 느끼고 교감할 수 있어 좋았다. ‘저 그림은 왜 비쌀까?’에 대한 미술사적 해답을 통해 호기심을 해결하고 교양을 쌓을 수 있었다. 결국, 논리적인 이유만으로는 구성되지 않는 것이 미술사일 것이다. 스타는 탄생한다기보다는 만들어지는 것 같으니까. 애초에 창조라는 영역이 그러하듯, 여러 상호작용의 결과로 구성되는 것이 ‘예술’ 그 자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