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lly] note. 무형의 내면과 눈 맞추기

가라앉은 마음, 숨은 자리, 묵묵한 생기
글 입력 2024.09.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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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llyfish Monologue}

note. 무형의 내면과 눈 맞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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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면을 조우하기 위해 펼친 꿈속(내면의 상상도랄까)에 머무를 땐 무턱대고 아무 데나 인사한다. 안녕, 안녕. 우연은 찰나의 차이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손쉽게 사라져서, 더 늦기 전에 무어라 인사라도 건네며 붙잡아야 한다.


내면을 조우하는 일시적인 공간이자 꿈은 대개 이렇게 시작된다 - 백지를 펼쳐놓고, 허공을 응시하며, 심장 주변과 눈가에 어른거리는 묘한 떨림을 느끼면서, 온 마음에 속삭인다. 안녕, 안녕. 아스라이 느껴지는 감각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인사 건네며 우연과 가까워지고, 우연과 손을 잡고, 우연과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뿌연 만큼 느린 시간을 맴돌며 어렴풋한 순간을 기록한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와 이미지는 흐린 잔상으로부터 낯설게 태어나 숨죽여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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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료 작가는 그런 내가 “까만 밤 언덕 위에 앉아 은하수 흐르는 하늘 위로 잠자리채를 들어 올린 채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 같다고 했다. 무언가를 잡기 위해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물망을 스쳐 지나가는 것 - 별, 바람, 어둠, 반딧불이, 지나가던 참새 그 무엇이던 - 을 그저 응시하기 위해 머무는 사람 같다고.

 

이번 여름을 보내주며 백로에게 편지를 쓰다가 나도 모르게 “우연과 필연을 구분하는 건 마음이라 생각하는 탓에…”라고 써 버렸었다(‘썼다’가 아니라 ‘써 버렸다’인 이유는 나보다 글이 먼저 앞서나간 순간에 나온 문장이기 때문이다). 편지를 손에서 떠나보냈는데도 그 문장이 유독 머릿속에 남아 맴돌았는데 내 곁을 아른거리는 이 문장은 내게 필연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썼으니 우연이라 해야 할까.


완전한 답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에 고민할수록 게슈탈트 붕괴처럼 판단이 어려워질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질문을 꼭 붙잡는다. 애초에 답을 찾기 위한 물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답을 고르는 대신 둘 사이에 서서 이들의 관계를 가만히 살펴본다. ‘나도 모르게 쓴 문장’이란 사건은 우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필연의 관점에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사유해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렴풋이 다음 질문이 떠오른다. ‘다음 질문’은 이 둘 사이에서 느껴지거나 떠오른 것을 실마리 삼아, 그리고 ‘나’란 사람이 가진 관점에 따라 다채롭게 나타날 수 있는데, 가령 지금의 나는 이런 질문으로 나아갔다. “마음이 우연과 필연을 구분한다면, 완전한 우연이나 필연은 없지 않을까”


모호한 채로 이어지는 사유지만 질문은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왜 없을까?” 이유를 고민하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마음이 내놓은 대답을 박제해 버리기 싫다’. 역시 막연한 질문에 이은 막연한 대답이다. 홀로 하는 대화처럼 전개된 여태까지의 사유를 좀 더 선명하게 관망하기 위해 이제부턴 몽상하기 시작한다. '몽상하기'란 간단히 말하면 사유의 내용을 형체로 담아내기 위해 ‘비유’의 그릇을 빌려오는 것이고, 이 그릇에 담긴 사유가 일종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나의 글과 그림이라 할 수 있겠다.


다시 박제하기 싫다는 생각으로 돌아오면, 여기서 촉발된 몽상의 내용은 이렇다 : 마음이 내놓은 목소리는 나비가 되어 마음속*을 배회한다. 살아있는 나비는 당연하게도 언제든 다른 몸짓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포한 확신의 정도에 따라 나비의 성향도 저마다 달라서 자기 자리를 찾아 가만히 착지하는 나비가 있는가 하면, 뭔가 불안한 듯 가만히 있질 못하고 사방을 날아다니는 나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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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을 내면에 자리한 어떤 공간처럼 지칭하곤 한다. 영혼이 맴도는 방이나 작은 오두막 같은 이미지랄까. 이에 따라 내면을 방(마음)들이 모인 집이나 오두막(마음)들의 마을 같은 이미지로 연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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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이곳저곳에 부유하는 상념을 가로지르며 마음에 잔재한 분진을 날개에 덕지덕지 묻히는 나비를 느끼면 괜히 심란해진다. 착지하지 못하고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걸 보면 오랜 망설임 끝에 내놓은 목소리가 솔직하지 않았던 건가 의심하게 되고, 의심이 거듭되면 그때의 내가 왜 이런 답을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게 된다. 더 나아가 의심이 지속되면 내가 낸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닌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진다. 이질감을 해명하려 애쓰는 사이 불안의 원인인 나비가 창밖으로 날아가 홀연히 사라지기도 한다. 이런 허무함. 존재를 붙잡아 마구 흔들다가도, 어느 순간 없던 게 돼버리곤 하는 마음의 기묘한 생태가 있다.


나를 곤란하게 하는 나비들이지만 이 현상(나비의 생애. 몸짓)은 내가 살아있기에 비로소 품은 변덕스럽고 무구한 날갯짓이고, 하염없이 움직이며 나를 증명하는 생명력의 증거다. 그래서 ‘이 일은 우연, 이 감정은 필연’ 하며 핀을 꽂아 나비를 벽에 박제하는 행위, 그 순간의 답만이 ‘나’를 표명하도록 가두는 행위는 거부감이 느껴진다. 찰나 떠오른 말 마디에 나를 가두는 대신, 곧 찾아올 다른 순간의 다른 ‘나’로서 마음 깊은 곳에 숨은 진심을 찾아볼 여지를 갖고 싶다. 즉, 멎어있기보단 흐르고 싶은 것이다. 지금 당장은 나비 탓에 멀미가 나서 토할 것 같더라도 결국엔 마음껏 배회하도록 두고 싶다. 내가 이 삶, 숱한 슬픔 속에 버티고 서 있다는 생명력의 증언으로서 살아 숨 쉬게 하고 싶다. 그러므로 나는 나비들을 ‘완전한 우연, 완전한 필연’이라는 말로 가둘 수 없다. 오히려 우연이었다가 필연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다른 우연을 데려오거나, 숨어있는 필연을 발견할 열쇠가 되어줄지도 모를 나비들이 자유롭게 공존하는 한 편의 정원을 꿈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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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고유함은 겉모습보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광경에 출처를 두고 있는 것 같다. ‘그 사람’이 유일하게 지닌 오묘하고 어렴풋한, 동시에 복잡하고 형언 불가한 마음, 영혼, 감정들. 나는 한 존재를 그답게 만들어주는 내면의 생태계가 궁금하다. 그래서 우연의 생태학자처럼 나의 내면을 하나의 세계 삼아 마음껏 배회하는 시간을 지나는 중이고, 이 보이지 않는 세계가 내게 일으키는 미묘한 변화를 잘 감각하고 싶어서 여러 시도를 하는 중이다.


‘내면을 몽상하기’의 두 번째 시도*인 {Jellyfish Monologue}(이하 {젤리 모노})는 형태 없는 내면을 다루는 만큼 두루뭉술한 기분 속에서 연재하는 중이다. 불확실성은 불안감을 안겨주기 때문에 그리 편한 기분은 아니다. 때론 해파리로부터 비롯된 나비들이 마음 곳곳을 쏘다녀서, 나는 종종 속 터지는 목소리로 “악! 아무 데나 일단 착지해 봐 아무것도 안 보여!” 소리치며 차분한 상태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했다(이 고통은 쓰고 그리는 내내 계속되겠다). 형태 없는 내면을 주제로 다루는 만큼 두루뭉술한 느낌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다가도, ‘조금만 노력하면 뭔가를 선명하게 발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나를 재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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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숨죽여 빛나는 나의 우울에게}


{젤리 모노}의 주제는 간단히 표현하면 “내면의 유동성”이다. 내면에 일어난 어떤 상태(감정, 기분, 상념, 떨림, 한 단어로 지칭하기 어려운 내면의 모든 사건)로부터 비롯된 미묘한 변화의 흐름을 해파리 안팎으로 일어나는 몸짓으로 비유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해파리 내면에 머무는 몽상가의 시선(완전한 전지적 시점도 아니고, 완전한 일인칭 시점도 아닌)을 통해 관찰하면 무엇을 기록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내면의 유동성, 이 추상적인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과정은 답이 없기 때문에 연재를 시작하자마자 나의 의도나 방법이 적절한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했다. 프롤로그부터 첫 세 편까지의 여정은 사실 그런 고군분투였다.


하지만 이토록 모호한 감각이 내면의 필연적 특징이라면 내면의 유동성을 완벽하게 판별하는 건 불가능한 것을 넘어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정확하게 지칭할 수 없다고 해서 내면이 불확실한 영역은 아니라는 것이다. 명확한 표현이 어려운 감정이라 해서 그 감정을 희미하게 느끼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상태말로 마음에 오래 남아서 계속 떠올리게 된다. 무엇보다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일수록 ‘슬픔’이나 ‘기쁨’ 처럼 특정 단어로 단정 짓지 않을 때, 존재만의 고유한 감정선이나 뒤섞인 채 공존하는 감각들의 다채로운 풍경을 엿볼 틈을 마련할 수 있는 것 같다. 어찌 보면 두루뭉술함에 이어 ‘형언 불가함’이야 말로 내면이 지닌 가장 분명한 정체성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 ‘형언 불가함’을 어떻게 상대하느냐에 따라 내면을 말하는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나는 ‘살아있다면, 내면은 정적이 아니다’라는 관점으로 내면을 마주한다. 방금 나비의 비유처럼 내면은 살아있는 한 꾸준히 생동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아주 가라앉은 마음마저도 그런 상태임을 스스로 느끼며 고요히 호흡할 테니까. 그런 호흡처럼, 나는 숨을 수밖에 없던 마음이 가라앉은 자리에서 희미하게 일어나는 작디작은 떨림을 목격하고 살아있음의 증거로 여겨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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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도 없고, 물살을 파고들 힘도 없어서, 파도에 휩쓸리며 부유하듯 존재하는 해파리를 이번 몽상의 주인공으로 데려온 이유가 이런 맥락일지도 모르겠다. 막연한 바다에 혼자 남아 특별한 의지나 목적지 없이 가만히 떠다니는 해파리만큼 그저 살아있어서 생동하는 미세한 떨림을 엿볼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가 또 있을까 싶다. 아마 나는 해파리를 통해 적막에 홀로 남아 이유 모를 마음을 되뇌며 ‘나’란 존재를 응시하는 최소한의 몸짓을 길게 응시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독백으로, 고백으로. 차분한 방황이 무심하게 새기는 흔적들을.


여러 모양의 호흡과 떨림이 있을 테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고독의 순간, 아무 이유 없이 홀연히 가라앉는 마음에 눈길이 간다. 슬픔, 우울, 외로움, 그 단어에 깃든 무한하고 뭉뚱그려진 맥락들에. 더 나아가 이 맥락들 때문에 몸 안팎으로 일어나는 통증을 끌어안고 버티고 서 있는 삶의 순간 자체에도. 감정이 시커멓게 고인 우물에 숨어 죽음에 가까운 듯 무거운 시간을 감내하는 머무름, 그 떨림에 시선을 보내주고 싶다. 텅 빈 공허, 까마득한 그림자처럼 알 수 없는 심연을 품은 마음마저도 살아있기에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거라면, 그 무거운 마음을 품은 순간에야말로 응축된 생명력이 맴돌고 있을 테니까. 서로를 해치지 않는 멀찍한 거리에서 그 묵묵한 생기를 그저 알아봐 주고 싶다.


그렇게 햇빛 아래 선명한 웃음보다는 벽 너머에 숨은 뿌연 마음을 찾아 나서는 방황을 선택했다. 무엇인지 몰라 입에 담을 수 없는 마음을 호명하기 위해 낯설게 소환한 비유를 따라 빙빙 돌아가는 독백의 시간을 잘 견뎌내고 싶다. 어쩌면 이 불가해한 영역에 나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과 삶의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내면과의 조우를 지속하기로 했다. 이런 오기를 품고 슬픔과 우울과 외로움을 마냥 놓을 수 없는 두 손으로 쓰고 그리는 사람으로 계속 살아갈 것 같다. 이런 추측은 지금처럼 사유가 나아가는 순간마다 또렷해진다. ‘나’란 사람이 지닌 내면의 맥락은 이것이니, {젤리 모노} 역시 그런 이야기일 것이다. 목적지 없이 또 갈피를 잃고, 파도에 휩쓸리듯 흐르고, 적막에 홀로 고이는 어린 마음의 어지러운 방황. 하지만 방황하기에 더욱이 살아있음을 표하는 우연한 존재, 내면에 관한 증언. 결국엔 필연이 될지도 모르는 이야기.


내면을 조우하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냐 묻는다면. 아마 당신의 가라앉은 마음도 그렇게 숨 쉬고 있을 거라고, 살아있을 거라고, 얘기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엔 나도 가진 정답이 없어서 모호한 언어로 겨우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람 앞에서 직접 이야기할 용기가 없어서 - 나야말로 너무 많은 마음을 숨겨놓은 사람이어서 - 유일하게 마음껏 다룰 수 있는 나의 내면을 꿈으로 지어서 내놓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팔을 뻗어 손을 맞잡을 자신이 없어서 활자와 이미지를 우리 사이에 둔 채 흐릿한 시선을 겨우 맞대어보는 걸지도 모르겠고. 모르겠고, 모르겠는, 이렇게 한 발짝 물러난 마음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서로 사이에 아주 많은 여백을 둔 채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마음의 무게가 꼭 알맞게 좋다.


문득 두루뭉술한 안개 속에 공존하고 있으나, 시야 속의 서로가 희미해 그림자만 겨우 알아차린 채 각자가 홀로 머무는 마음과 기억의 광경을 그려보게 된다. 내 안에도, 그리고 나의 밖에서도 이런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 거라고 잠시 생각해본다. 마음을 담은 글과 그림을 사이에 두고 모습 없이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무형의 우리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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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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