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도망침의 미학 [영화]

글 입력 2024.07.2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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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나들이. 사진 직접 촬영.

 

 

대학교에 다니던 4년 내내 꾸준한 출석률을 기록했다. 지하철이 연착돼서, 또는 코로나에 걸려서 강의에 늦거나 결석한 적은 있어도 일명 '자체 공강'을 시도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 내가 막학기에 딱 한 차례 자체 공강을 감행했다. 수업에 빠져 진도에 공백이 생기는 것을 선호하지 않던 스스로에게 큰 도전이었다.


큰맘 먹은 일탈에 비해 발단은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그저 벚꽃 핀 4월을 만끽하고 싶어 친구와 학교에서 멀지 않은 현충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꽃이 잔뜩 핀 풍경이 예뻐서, 그 안을 노니는 기분이 좋아서 한참을 그곳에 머물렀다.


속된 말로 '흥을 깨고 싶지 않은' 마음이 머릿속을 지배한 건 그때였다. 친구와 함께 또 다른 추억을 더하려 여의도로 출발했다. 강의가 시작하기까지 15분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양복을 입은 채 출입증을 메고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는 직장인들 틈에 벚꽃이 여기저기 고개를 내밀었다. 여의도 공원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잠시 걸음을 멈추고 꽃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 같은 대학생들, 직장인들, 아이들 너나 할 것 없이 꽃을 구경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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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메인 테마인 신주쿠 교엔 정원. 출처 : 언어의 정원 공식 포토

 

 

장면의 배경을 비롯한 주인공의 나이대/풍경은 사뭇 다르지만, 최근 일본 여행을 다녀오며 관람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 <언어의 정원>은 내내 이 장면을 계속해서 떠오르게 만들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각자가 소속된 공간에서 잠시 벗어나, 정원 안에서 평온함을 느끼는 모습은 그날과 무척 겹쳐 보였다. 꽃놀이 날은 햇볕이 쨍쨍해 냉면이 어울리는 날씨였고, 영화는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씨에 가끔은 비바람까지 동반했는데도 말이다.


* 영화 ‘언어의 정원’은 15세 학생 타카오와 27세 직장인 유키노가 비가 오는 날마다 신주쿠의 한 정원(실존하는 장소로, 공원 이름은 ‘교엔’이다)을 방문하며 그려내는 장면을 다룬다.


두 사람은 비가 오는 날이면 이끌린 듯 정원 속 우두커니 자리해 있는 정자로 향한다. 한 사람은 학교 수업을 빼먹고, 한 사람은 일터로 향하던 발걸음을 무겁게 돌려 공원의 정자에 자리 잡는다. 두 사람은 따로 또 같이 빗소리를 배경으로 각자의 복잡한 머릿속을 씻어내린다. 불확실성에 주저하던 꿈을 향해 나아갈 용기를 얻기도 하고, 억울한 누명으로 갑작스레 찾아온 위기를 딛고 다시 일상을 마주할 준비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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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 시내 전경. 가득 들어찬 건물과 평화로운 공원의 모습이 대비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출처 : 언어의 정원 공식 포토

 

 

두 사람의 감정선은 그들이 머무른 공간의 큰 대비감을 통해 묘사된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일상을 바삐 시작하는 신주쿠역사와 세상에 둘밖에 없는 공원. 둘을 괴롭히는 주체와 치유하는 주체 모두 신주쿠 안에 자리한 셈이다.


공원과 달리 신주쿠역은 두 사람이 돌아가야 할 본래의 일상을 상징한다. 비가 오지 않아 만남을 기약하지 못했을 때에는, 여지없이 유사한 자세로 지하철 안에서 생각에 빠져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비춰진다.


얼마 전 도쿄 여행을 통해 마주한 신주쿠역의 모습은 다른 역사와 비슷한 듯 달랐다. 우리나라로 비유하면 시청역 같은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밤 11시가 되었는데도 출퇴근 시간 같은 인파를 자랑했다. 이 역에 모인 사람들을 한명 한명 만나 얘기 나눠보면 모든 희로애락의 감정이 다 담길 듯한 느낌이었다. 영화에서 신주쿠역을 왜 본연의 일상 그 자체로 설정했는지 그 이유를 실감한 순간이다. 심지어 관광객의 입장에서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 안에 가득 찬 사람들을 보자마자 도쿄 시민들이 분주하게 보냈을 일상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간이 주는 힘은 생각보다 크다. 유키노와 타카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가끔씩은 쳇바퀴같이 굴러가는, 혹은 모종의 이유로 나를 괴롭히는 일상의 크고 작은 고민에서 벗어난 어디에선가 마음의 평안을 느끼고픈 때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제는 어느새 대학생에서 직장인의 신분이 되었지만, 가끔씩 대학생 시절의 이 짧은 일탈이 생각나는 순간들이 있다. 이제는 책임질 것들이 더 많아지고 꿈꾸는 목표가 더 다채로워져서 강의를 빼먹는 식의 도전은 감행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따금씩 벚꽃이 가득 핀 여의도 공원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언어의 정원> 속 공원처럼 일상 속 소소한 기쁨을 전해주는 공간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쓸데없이 생각이 복잡해지는 날이면 동네 사찰에 들러 빗소리를 감상하고, 그날따라 하루가 유독 길다고 느껴질 땐 좋아하는 카페에 가 녹차 크루아상을 먹는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내 하루를 씻어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을 하나씩 가지고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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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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