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자기암시가 저주가 되어버린, 나이트메어 앨리 [영화]

글 입력 2024.07.28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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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전작들에서 주로 보아온 괴랄한 크리쳐들은 없지만, 다른 결의 서늘하고 처참한 기운이 '나이트메어 앨리'에는 있다.


먼저 언급하고 싶은 건 이 영화에는 모순적인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먼저는 ‘자유와 억압의 공존’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지 논해 보고 싶다.

 

 

나이트메어앨리1.jpeg

 

 

주인공 스탠턴이 자신의 과거를 청산하고 당도한 곳은 카니발이 펼쳐지는 한 유랑극단의 무대이며, 그가 종반에 감금되는 공간 또한 그곳이다. 본래 카니발은 기존에 고착화됐던 정상/비정상 담론과 금기에서 탈피해 자유를 실현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본 무대에서의 카니발은 또 다른 양상의 인간 소외의 풍경으로 묘사된다. 포주에게 길들여진 기인은 술을 얻기 위해 관중 앞에서 살아 있는 닭의 목을 물고 흡혈하며, 관중은 이에 환호한다. 이뿐 아니라 사산된 태아의 사체들을 방부 처리해 진열해 놓은 장면 또한 기이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면, 카니발이라는 축소 무대로 보나 스탠턴의 극적인 삶 전반으로 보나 영화는 마치 자유, 선택에 의한 것처럼 영화를 전개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한 인간 혹은 인간들이 오히려 억압받고 소외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부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논의를 좀 더 확장해 인간의 자유의지와 운명론의 관점에서도 논해 보고 싶다. 극중 스탠턴의 행로를 따라가다 보면 어둠을 향해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저항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에 절로 이끌려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는 그 두 가지 요소가 혼재되어 있는 듯도 한데, 그렇게 보자면 또 어디까지가 그의 선택인 것이고, 어디서부터 운명이란 것이 개입하고 있는지 분간하기가 모호하다.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는 이 질문에 꽂혀 나름대로 명확한 답을 정의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해 계속 곱씹다 보니 이에 대해 고민하는 건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던, 운명론이던 갈래만 다를 뿐 결국 어떠한 ‘믿음’의 문제인 것 아닐까. 내 삶의 경로와 결말에 대해 대충 이러할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이 악몽, 자기 암시가 되어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 아닐까.

 

마치 극중 지나의 거짓 독심술에 속아 오열했던 여성처럼.

 

 

[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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