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한 건 아니지만, 낯선 이들과 처음 만나는 날엔 무난한 아이템 하나, 조금 튀는 아이템 하나를 섞어 착장을 입게 된다. 나 튀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 지루한 사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날도 정한 적 없는 나만의 원칙에 따라, 무난한 회색 브이넥 맨투맨에 블랙 도트 머메이드 라인의 롱스커트 그리고 캐주얼한 무드의 워커를 매치했다.
상덕, 윤, 인규 그리고 나.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압구정의 한 갤러리였다. 명색이 전시 모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전시를 함께 보기로 했다. 어쩌다 그 전시를 우리가 보게 된 건지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그냥 시기가 맞았던 거 같다. 밝기만 해서 입체감을 느낄 수 없던 그 전시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날이 맑아서였을까. 전시고 취향이고 뭐고 난 마냥 기분이 들떴다. 튀지도 않고, 지루하기도 않은, 적당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고른 착장이 무색하게 애처럼 잔뜩 신이 났다. 벚꽃이 개화하기 시작했고 하늘은 파랬으며 우리 넷은 밥집을 찾아 걷고 있었다. 투명하고 맑지만 잘 보이지 않는 윤, 오래된 나무나 가죽의 멋스러움을 닮아 포근한 상덕 그리고 눈동자가 크고 짙은 총명하고도 다정한 인규. 물결이 데려다 놓는 곳으로 흘러가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스스로를 잊은 채 그들을 따라 마냥 발 닿는 곳으로 걸었다. 함께하는 것 외에 큰 목적이 없는 한낮의 걸음은 자유로웠다.
자신을 잊기에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빛이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빠지는 것이다. 나에게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고 싶던 그 시기, 아무래도 잠시간은 그들에게 구애하게 될 것 같았다. 난 스스로에 대한 권태나 수치심을 그런 식으로 곧잘 해결하곤 한다.
첫 만남 이후, 짝사랑을 시작하게 된 사람처럼 아무것도 모르면서 난 그들에 대해 주절거렸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쉽게 지루해지지 않았다. 친구들, 애인, 엄마 가리지 않고 그들에 대해 말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글을 구태여 다 찾아보진 않았다. 첫 놀라움은 그 후의 그것과 견줄 수 없으니, 앞으로 서로를 발견하고 놀랄 여지를 남겨두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조금 편해져 말을 놓기로 한 행궁동에서의 두 번째 만남 이후로도 우리는 단체 카톡방에서 계속 존댓말을 했다. 성급하고 싶지 않았지만 실은 언제든 그들이 부르면 달려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화창한 날 애인과 여의도에서 피크닉을 즐기면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맛있는 마늘 보쌈과 부드러운 낙지볶음을 먹으면서도, 서촌의 한 LP 바에서 혼자 음악을 들으면서도 그들을 떠올렸다.
만날 때마다 전시에 대한 다양한 관점보다 그들의 생각과 근황이 궁금했고, 플랫폼에 아는 이름의 글이 올라올 때면 이야기 건네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먼저 연락하려다 괜히 소심해져 주저하고 포기한 적도 몇 차례 있다.
행궁동에 이어 성수와 서울숲 그리고 평창동을 함께 했다. 하릴없는 사람들처럼 만날 때마다 하루 종일을 걷고 먹고 이야기하고 마셨다. 정말이지 사치스러운 허송세월이었다. 상덕의 말마따나 전시는 핑계에 불과한 것이다.
잘난 이에겐 시샘이, 마음을 사고 싶은 이에겐 두려움이 앞서는 속이 쩨쩨하고 겁많은 내가 살며 흥청망청 마음과 시간을 내어 줄 기회가 앞으로 얼마나 있을까. 읽고 있다면, 당신들은 그런 의미에서 꽤 운이 좋은 걸지도 모른다. 농담이다. 농담을 건넬 만큼 친해졌지만 아직도 우리 사이에 느슨한 듯 팽팽한 거리감이 있다는 것 또한 안다. 나는 왠지 그게 아쉽지 않다. 되려 그건 앞으로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감칠맛을 더할, 반드시 필요한 무엇이라고까지 생각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서로 고수하고 있던 일말의 친절과 품위를 각자 자기 손으로 직접 허물어뜨릴 그날을 상상하며, 난 반갑게 다음을 인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