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마니아가 대중을 선도한다 [드라마/예능]
-
뭐든지 뒷북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나는 최근에 공개된 지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난 <크라임씬 리턴즈>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사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장 노트북을 덮고 추리 예능을 재생하고 싶다는 욕망과 싸우는 중이다. 직접 추리를 하는 것은 약하지만 남들이 추리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과 방탈출만의 스토리텔링에 흥미가 많았던 나는 밤새 크라임씬 리턴즈를 정주행하고 말았다. 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예전부터 마니아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더 지니어스>를 몰아서 보거나 심지어 중학생 시절에는 <크라임씬> 이전 시리즈를 회차별로 구매해서 보기도 했다.
2024년 상반기는 특히 추리물을 애정하는 마니아들에게 굉장히 소중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 <여고추리반2>, 추리물 마니아의 심장을 떨리게 한 <크라임씬 리턴즈>, 최근에 넷플렉스에서 공개되어 화제를 모은 <미스터리 수사단> 등 추리 예능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마니아 장르의 중심에는 추리물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추리 예능의 중심에는 바로 정종연 PD가 있다. 정종연 PD는 '마니아 PD'로 불리우던 사람이지만, 이제는 '마니아뿐만 아니라 대중까지 사로잡는 PD'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추리 예능'의 형태가 생긴 지는 얼마 안 되었다. 2010년대 중반, 방탈출 카페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대중들에게 조금씩 알려지던 방탈출은 <대탈출>과 같은 형태의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
과거에는 출연진들을 한 곳에 모아둔 채 특정 공간과 상황을 제시하는 지금의 추리형 예능 포맷이 존재하지 않았다. 흔히 출연자들이 머리를 써서 정답을 맞히는 퀴즈쇼나 탐정에 빙의하여 문제를 푸는 생존형 예능이 전부였다. 이러한 예능 프로그램은 주로 상대방과 경쟁하여 살아남아 최후의 1인을 정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처음에는 시청자들도 출연진의 비상함에 감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반적으로 출연진의 지식만을 드러내고 서로 경쟁하는 프로그램에 지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조금 더 대중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공감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그들의 세계 속을 체험할 수 있기를 원했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출연진보다 깜짝 놀랄 만한 포인트에서 나와 함께 놀라주는 친근한 연예인을 바란다.
요즘은 천재적인 출연자를 보며 경외심을 느끼는 것보다 나와 비슷한 플레이어들을 보며 참여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이 더 환영을 받는 추세다.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 바로 <대탈출>, <미스터리 수사단> 등의 스토리가 결합된 예능 프로그램이다. 시청자들은 스토리에 몰입하고 공감하며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출연진을 보며 환호한다. 이러한 마니아적인 추리 장르와 대중적인 예능 프로그램 포맷이 결합하여 ‘추리 예능’이라는 새로운 서사 콘텐츠를 생성하게 된 것이다. 그가 만든 ‘추리형 예능’은 소수의 마니아 시청자들 사이에서만 퍼지다가 이내 방탈출 장르에 익숙하지 않았던 대중들의 이목까지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오프라인 공간으로의 확장
시청자들은 더 이상 온라인 공간에서만 머물고 소통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직접 방송의 출연진들과 똑같은 체험을 하길 바라며, 우리는 현재 다수를 위한 체험 시스템 구축이 가능한 시대 속에서 살고 있다. 방송 프로그램의 오프라인 공간이 최근 들어 급격히 확장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오프라인 공간의 가능성을 먼저 열어준 곳은 바로 넷플릭스이다. 넷플릭스는 과거 <오징어 게임>의 놀이터 세트를 홍대입구역 내부에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오프라인 공간 영역을 찬찬히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오프라인으로의 확장은 콘텐츠 기획자들로 하여금 온라인만큼이나 오프라인 공간 기획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이러한 오프라인 공간의 유행은 '실제로 테마 공간을 체험하는 나'를 촬영하여 SNS에 공유하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의 욕망과도 잘 맞아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대탈출> 경우, 2019년 tvN에서 진행하였던 '즐거움전' 행사에서 방송으로만 보던 촬영장 세트를 시청자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이벤트 공간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요근래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되었던 ‘이토준지 호러하우스’ 전시회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니아의 영역에 속한다고 평가받던 이토준지 만화는 홍대에서 해당 작품을 핵심 콘셉트로 한 전시회가 열릴 수 있을 정도로 주류 문화가 되었다. ‘이토준지 호러하우스’뿐만 아니라 소위 ‘오타쿠 문화’라고 불리우던 다른 애니메이션의 팝업 전시회도 여러 매체를 타고 널리 퍼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바뀐 ‘마니아 장르’에 대한 인식
예전에는 마니아들 사이에서만 유행하던 방탈출은 이제는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프라인 콘텐츠가 되었다. 이처럼 과거에는 소수의 향유층만 소비한다는 경향이 강한 콘텐츠도 이제는 대중의 문화 트렌트를 이끄는 선두주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마니아적인 콘텐츠 취향을 숨기거나 감추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하게 드러내고 이를 콘텐츠화하는 크리에이터들도 늘어나고 있다. 결국 대중의 문화 흐름을 이끄는 장르는 ‘주류이냐 비주류이냐’에 구애받지 않고, ‘누가 먼저 문화 시장에 자리 잡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마니아가 얼마든지 대중의 트렌드 흐름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비주류가 주류의 자리에 도달하기까지, 그리고 그들의 취향과 문화가 존중받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는 걸 나는 안다. 콘텐츠와 취향을 넘나들며 모두의 장르가 인정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임유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