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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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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극 <섬:1933~2019>은 제목에서도 그러하듯 1933년부터 2019년까지의 시간을 담아내고 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이라는 실제 역사적 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차별받고 소외받은 이들의 삶에 귀를 기울이며,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낸다.

 

1930년대 소록도의 한센인 백수선, 1960년대 한센인들을 위해 일평생을 헌신한 마리안느와 마가렛, 2010년대 서울 발달 장애아의 엄마가 된 고지선. 무대 위에서 이 네 사람이 살던 3대의 이야기는 순차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이 특별하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과거에서 더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가기도 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차별과 혐오의 시선을 감당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공통점이 시대를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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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선의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1933년, 일본은 조선나예방령을 근거로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을 소록도로 강제 송치했다. 부랑 생활에 지친 환자들은 치료도 받고 살 터전을 마련해 준다는 이야기를 믿고 제 발로 소록도를 찾기도 했다. 극 중 백수선이라는 인물은 소록도 갱생원에 들어온 한센병 환자 중 한 명이다. 백수선은 참혹한 현실과 고된 노역 속에서도 박해봉이라는 인물과 사랑을 키워나가며 희망을 잃지 않는다.

 

이 극이 보여주는 당시 소록도의 모습은 극도로 가슴 아팠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격리된 한센병 환자들이 한 달에 한 번 가족들을 면회하는 장면이었다. 그들의 면회가 이루어지는 곳은 ‘수탄장’이라 불리었는데, 서로를 눈으로만 담아야 했던 안타까운 모습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들에겐 서로를 어루만지거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일렬로 줄지어 선 환자들과 가족들의 만남은 멀찌감치 선 채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특히 바람에 의해 전염되지 않도록, 아이들은 바다 바람을 등지고 선 채로만 한센병에 걸린 자신의 부모를 바라볼 수 있었다. 면회 시간이 끝나면 그들은 또다시 가슴 아픈 이별을 경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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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소록도에 들어와 43년간 한센병 환자들을 치유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극은 실존 인물이었던 두 사람의 일생에 극적 인물을 더해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이끌어간다. 극중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동료가 되었던 고영자는 소록도에서 나고 자라 치료실에서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돕는 인물이다. 이후 시간이 흘러 고영자는 더 큰 꿈을 꾸며 섬 밖으로 나가 세 명의 자녀를 낳아 기른다.

 

여기서 고영자의 자녀 중 한 명이 바로 발달장애아의 엄마가 된 고지선이다.

 

2009년 서울, 김형진과 결혼해 아이를 낳게 된 고지선은 자신의 아이가 특이점을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불안함을 감지한다. 불안함은 곧 현실이 되고, 고지선은 자녀 김지원이 발달장애라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된다.

 

고지선의 이야기를 다루는 장면들은 특별하지 않아서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동시대의 이야기였으며, 남의 이야기도 아닌 우리의 이야기였다. 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고, 당장 극장 밖을 나서면 마주할 수 있는 풍경이자 사람이었다.

 

극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던져준다.

 

가슴 아픈 역사는 우리가 인지해야 할 과거로 남게 됐지만, 고지선의 이야기는 여전히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철저히 현재였다.

 

고지선은 남편과 대화를 나누던 중, 과거 자신이 연주회에서 장애아의 행동 때문에 불만을 가졌던 일을 회상하며 스스로가 '벌을 받고 있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감정이 격해진 그는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냐'라며 울분을 토했다. 그의 울분 뒤에 몇 초간의 짧지 않은 정적이 흘렀다. 오로지 고지선을 연기하는 배우의 헐떡이는 호흡만이 무대와 객석을 넘나들었다. 그리고 이내 곳곳에서 들려오는 훌쩍임이 침묵을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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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고지선의 자녀 김지원이라는 인물은 배우의 등장 없이 '모자'로 지칭되었는데, 별도로 외적 묘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특수한 행동과 외모를 연기하는 순간 그 또한 또 다른 편견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지선은 아이를 데리고 지하철을 탔을 때 겪었던 일화를 관객들에게 이야기하며 온몸으로 상황을 표현한다. 갑자기 지하철을 운동장이라 느끼기 시작했는지 지하철 안을 마구 달리기 시작하는 자녀와, 아이의 뒤를 따라 달리는 고지선. 엄마인 그가 함께 달리는 것은 언제든 아이의 돌발 행동을 제지할 의무가 본인에게 있기에 안심하라는 의미이다. 그는 열심히 달리며 이렇게 표현한다.

 

'아이의 돌발 행동에 사람들은 놀라고 불편한지 힐끔힐끔 시선을 던진다. 하지만 5분 정도 지나자 사람들은 아이가 달리는 모습에 관심을 끄고 고개를 돌리기 시작하며, 아이가 지나다닐 때 혹시나 자신의 뻗은 발이 걸릴까 봐 발을 치우기도 한다.'

 

이는 즉, 우리는 충분히 장애를 가진 이들과 어우러져 더불어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을 ‘장애‘라고 차별하고 억압한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었는지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장면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한자리에 모인 고지선은 그들에게 끝없는 동정과 위로의 눈빛을 받았고, 끝내 시설을 권유하는 가족의 말에 고지선은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고지선을 괴롭게 한 것은 손상을 입은 자녀의 상태도 아니었고, 장애아를 케어하는 본인의 처지도 아니었다. 그런 그와 아이를 평등하게 바라보지 않는 사회의 시선이었다.

 

장애인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는 말이 있다. 기능적 손상을 입는다고 해서 바로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다. 손상 다음 ‘차별과 억압’이라는 단계가 장애를 만든다. 즉, 차별이 ‘자립할 수 없음’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극은 우리 사회 통념의 문제점을 찌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섬:1933~2019>는 단지 목소리를 낼 뿐이다. 과거의 일이 그저 과거로 묻히지 않게 들추는 것뿐이고, 그때의 차별과 소외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며, 그 속에서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따뜻한 마음을 나누었던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사랑과 희망에 조명하며 우리의 마음을 치유한다.

 

극이 끝나고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찌릿한 마음과, 희미해지지 않는 여운을 끌어안은 채 극장을 나섰다. 보는 동안 참 많이 울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그 사실들이 가슴 아프면서도 따뜻해서. 그리고 사랑과 희망을 노래하는 배우들의 목소리가 한없이 다정해서 한참을 울었다. 참 많은 이들에게 읽혀야 할 작품이자, 보여야 할 공연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따뜻하고도 뜨거운 공연이 많이 행해지고 널리 알려지기를, 나 또한 이런 예술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사진: ⓒ국립정동극장, 라이브러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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