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일 한국에 난니 모레티의 <찬란한 내일로>가 개봉했다.
<찬란한 내일로>는 영화 찍기에 대한 영화이다. 난니 모레티가 직접 주연을 맡은 감독 조반니는 5년 만에 1956년 헝가리 혁명에 관한 영화를 시작하게 된다. 그렇지만 시작부터 난관이 쏟아진다. 이런 정치색이 강한 영화는 그 누구도 관심 없다는 주변의 핀잔은 예삿일이고 제작사로부터 투자는 엎어져 당장 영화 촬영을 지속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다. 평생을 함께한 아내는 독선적인 조반니의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이혼을 요구한다.
세상과 불화하며 살아가기
극 중 조반니는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감독으로 묘사된다. 훌륭한 상을 타왔으며 진보적 성향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그의 영화는 예술성이 높이 평가되어 왔다.
동시에 조반니는 고집불통에 매사 자기 말만 옳고 영화 외에 모든 일상은 자신의 배우자에게 평생 떠넘겨온 무책임한 사람으로도 그려진다. 아내가 일하는 촬영장에 찾아가 예술성에 대한 논의로 전 직원과 배우를 잠 못 들게 하고도 멈출 줄을 모른다.
이런 그가 쌩쌩이를 타며 ‘당신의 영화는 체제 전복적’이라는 말을 듣고 못내 기쁜 웃음을 짓는 모습은 기다리던 칭찬을 듣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사회 참여적’ 혹은 ‘체제 비판적’이라는 일종의 평가만큼 창작자에게 난처한 것이 있는가를 생각한다. 내가 불화하는 세상은 넓고 견고하여 나의 비뚤어진 입장마저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포용한다. 이미 너의 의도를 다 안다는 듯이 말해버린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포용 되었구나.
세상과 불화하며 살아가는 일은 그 누구보다 체제에 깊이 연루되어 살아가는 일임을 생각한다. 그의 업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조반니는 체제 안에서 체제를 비판한다. 비판적이기 때문에 영화를 찍는 것이든 영화를 찍었는데 지문이 묻듯 비판적이게 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누구도 세계의 밖으로 나갈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이 안에서 할 수 있는 걸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그는 불화하면서도 멀쩡하게 세상을 살아간다.
분명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근대는 우리에게 마음대로 주체성을 쥐여줬고, 우리는 난데없이 주체적 인간이 되었다. 그렇지만 근대는 역설적으로 한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줄여나가는 데 전력을 다해왔다.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 주체적인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어설픈 추측만을 가진 채, 그것을 실현할 방도도 없이 우물쭈물하며 사는 것 아닌가. ‘갓생’을 살든, 공산당에 가입하든, 그 어느 쪽도 내 몫은 아닌 거 같다고 생각하든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살아있는 주체성을 확인해 보는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고유함을 확인하는 선언, 이를테면 ‘○○ 만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는 쉽게 우스워지곤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런 선언을 자주 기다리곤 한다.
팬데믹 시기는 산업 전반의 위기였지만 공연예술 영역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사람들은 영화관과 극장에 모이는 것을 꺼렸다. 이 와중에 다수의 영상 플랫폼 매체는 대세 혹은 유행을 넘어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플랫폼에 구독만 하면 평생 다 보지도 못할 콘텐츠가 쏟아진다. 알고리즘은 내 취향을 반영해 다음에 볼 동영상 혹은 영화를 자동으로 추천해 준다. 한편으로는 영상 플랫폼의 급속한 확대로 인하여 사람들이 점점 긴 호흡의 콘텐츠를 소화하지 못한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팬데믹 시기 벌어진 교육격차는 수치로 증명되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영화를 보는 것이 단순한 유희 오락으로 여겨졌다면 이제는 100분이 넘는 영상을 앉아서 본다는 것만으로도 교양으로 여겨진다.
이제 영화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전 세계 소비자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의 짧아진 주의집중 시간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OTT로의 진출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정적인 정치색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고려해야 할 것은 늘어나지만 그렇게 늘어나는 제작의 조건들은 정말로 누구를 위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난니 모레티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감독일 뿐만 아니라 연출과 각본, 제작 배우, 배급까지 도맡아왔다. 또한 그는 좌파이다. 자신의 정치적 지향은 영화로 표현된다.
만약이라는 말은 우습지 못하다
극초반 나는 조반니가 영화 세트장에 걸려있던 레닌과 스탈린 포스터를 보다가 스탈린 부분을 찢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연출 직원의 말대로 고증을 따른다면 이탈리아 공산당 지부 벽면에는 레닌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얼굴도 걸려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반니는 직원의 조언에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해 했다. 이건 내 영화이기 때문에, 스탈린의 초상은 나올 수 없다고 직원들에게 떼를 썼다.
어떤 이는 스탈린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을 수 있지만, 스탈린주의가 사회주의의 이름과 역사 위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방도는 없다. 사회주의라는 혹은 마르크스의 말대로 현실을 지양하는 그 어떤 마음이라도 품은 이들이라면, 우리는 이 유산 위에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섣부른 끝을 말하거나 있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말이다. 일그러지고 독선적인 조반니의 얼굴을, 그리하여 난니 모레티의 얼굴을 통해 나는 바꿀 수 없이 켜켜이 쌓인 역사 위에서 하는 수 없이 내일을 그려야 하는 우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우리는 찬란한 내일로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방직공 출신의 훌륭한 당원 역할을 맡은 여배우는 이 조반니의 영화를 사랑 이야기로 해석했다. 대본은 감독의 영역이지만 이를 표현하는 것은 배우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녀는 번번이 조반니를 화나게 한다. 조반니는 자신의 해석에 어긋난 모든 행위를 통제하고자 하는 감독인 반면 여배우는 자신의 해석을 연기에 녹여내는 배우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랑이라며 남배우에게 기습 키스를 한 여배우를 향해 조반니는 ‘이건 정치물’이라며 길길이 날뛴다. 그렇지만 영화 밖 현실에서 여배우와 남배우는 서로 사랑에 빠진다.
꺾이지 않을 듯한 신념과 의지는 현실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는 말. 그 무너짐은 나쁜가.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처음과 전혀 다른 마음을 먹게 되는 것. 그 결심은 배반인가. 영화를 찍으며 달라진 조반니는 자신의 결말을 수정한다. 나는 조반니가 자기 고집을 계속 부릴 수 없는 상황에 놓여버리게 되는 것이,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는 것이 좋아 보였다. 울퉁불퉁한 이야기를 가지게 된 것이 사랑스러웠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는 말은 시시할 정도이지만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만약’의 가정법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와 과거를 딛고 있는 현재의 가능성을 함부로 닫지 않는 것. 그리하여 이것은 극 중 감독 조반니가 찾은 영화의 의의이자 언제나 좁게만 허용된 해방의 공간에서조차 우리가 해맑은 웃음을 지울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해맑게 결말을 고쳐먹는 조반니의 결정을 보면서 나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고쳐먹은 결말로 조반니는 동시에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했다. 영화가 아직도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답했고, 역사의 모순 속에서도 정치적 신념을 고수한 것처럼 살아버린 자기 삶에 대해 답했다. 그리고 감독의 성실한 답변은 <찬란한 내일로>를 관람할 관객들에게도 무언가 답해버리고 싶게 한다. 하고 싶은 말은 이미 극장에서 눈물로 다 쏟아버렸지만, 걸을 힘은 아직 남아있으니, 조반니와 친구들의 행렬에 웃는 낯으로 함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