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주 평범한 관계, 폭력, 그리고 성장 - 벌새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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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서울, 아주 평범한 중학생 소녀가 있었다. 성은 한국에서 가장 흔하다는 김 씨고, 이름도 흔하디흔한 ‘은희’다. 수업 시간에 만화를 그리며 지루함을 달래고, 한문학원에서는 친구와 필담을 주고받으며 키득댄다. 가족으로는 시장에서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님, 공부보다 노는 일에 관심이 더 많아 ‘내놓은 자식’이 된 언니, 그리고 성적이 우수해 대원외고 진학을 준비해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오빠가 있다.
영화 <벌새>는 1994년 서울을 살아가는, 너무나 평범한 소녀 은희의 일상을 잔잔하게 담아낸다. 어떤 극적인 장면도 없이, 조용하고 묵묵히, 그녀의 삶을 쫓는다. 은희의 삶 곳곳에는 폭력이 박혀있다. 영화는 그 폭력을 과장하지 않고 그저 응시한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잔잔하고 일상적인,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평범한 폭력들.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일인 듯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에 가슴 한쪽이 답답해진다.
영화 <벌새>엔 가족의 식사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온 가족이 둘러싸인 식탁. 어떤 배경음악도 없이, 숟가락과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식탁의 중앙에 앉아 가족들에게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아빠의 목소리만이 조용한 부엌을 채운다. 아빠는 큰소리로 가족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를 위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너희들은 그걸 알기나 하는지. 엄마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 모두는 묵묵히 듣고만 있다. 아빠가 수저를 들자, 그제야 가족들은 밥을 먹는다. 어느 날 아빠는 식사 자리에서 선언하듯 말한다. 대훈(아들)이 대원외고에 합격하고, 서울대에 입학하기 위해서 가족들이 모두 신경 써야 할 때라고. 가족구성원들에게는 대훈이 신경 쓸 일이 없도록, 그의 공부를 방해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고, 아내에게는 특별히 대훈이 먹을 반찬의 가짓수를 늘릴 것을 지시한다. 아빠의 이야기가 끝난 후 이어지는 식사 시간은 고요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밥을 먹는 데에만 집중한다. 식기가 부딪치며 나는 달그락 소리만이 주방을 채운다.
은희는 방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언니와 함께 방을 쓰고 있다. 아들인 대훈은 당연하게도 혼자 방을 쓴다.
은희와 남자친구가 단둘이 있는 걸 본 오빠 대훈은 은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야!’ 그는 여러 차례 은희를 부른다. 크고 강하게, 무시와 경멸을 담아서. 자신의 방으로 은희를 호출한 그는 은희에게 모욕적인 말을 내뱉고, 다시 사라질 것을 지시한다. 은희는 나직이 말한다. ‘미친 새끼.’ 대훈은 은희를 쫓아 그의 방으로 들어간다. 퍽퍽 소리가 들린다. 그는 은희를 때린다. 그것도 아주 자주, 일상적으로.
학교에 있는 은희. 담임선생은 반 아이들에게 종이를 돌린다. 그리고 그 종이에, 우리 반에 있는 날라리 두 명을 적어내라 명령한다. ‘공부 안 하고 헛짓거리하는 놈들’, 날라리를 반드시 학급에서 색출해 낼 것이라고 그는 다짐한다.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 담임은 반 아이들에게 일제히 외치게 한다.
수업 시간에 만화를 그리고, 쉬는 시간에 웅크려 누워있는 은희. 동급생들은 그런 은희를 두고 숙덕거린다. 공부도 못하고 생각도 없는저런 애들은, 대학도 못 가고 나중에 파출부나 하겠지. 남자친구를 사귀고, 스트레스를 풀러 노래방과 클럽을 드나드는 은희. 그런 은희가 학급 날라리 색출 조사에서 날라리로 뽑히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너 반에서 날라리로 지목됐다며. 선생님이 오늘 떡집에 찾아오셨어.” 엄마는 걱정스럽게 말한다. 은희는 고단한 하루를 보낸 엄마의 어깨에 파스를 붙여준다. “너 날라리가 되면 안 돼. 여대생이 되어야 해. 가슴에 책 하나 품고 다니는, 여대생.” 엄마가 말한다. 얼마 전, 늦은 시간 은희의 집에 술에 취해 찾아온 외삼촌은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내 학비 때문에, 똑똑한 여동생이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고. 오빠를 위해 당연히 희생해야 했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했던 엄마는 자신의 딸이, 자기가 그토록 꿈꿨던 삶을 살길 바란다. 파스를 덕지덕지 붙인 그녀의 뒷모습을 은희는 조용히 응시한다.
은희의 유일한 친구는, 한문 학원에 다니는 지숙이다. 그녀는 마스크를 쓰고 온다. 지숙이 마스크를 쓰고 온 이유는 얼굴에 난 상처 때문이다. 지숙은 오빠에게 골프채로 맞는다. 은희는 검도 검으로 맞는다. 그들은 맞고 사는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지숙은 오빠 때문에 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죽으면 어떨지 상상한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오빠와, 오빠를 질책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고소하다고. 그리고, 쓸쓸히 덧붙인다.
다들 우리한테 미안해하긴 할까?
영화는 고요하다. 고요한 화면 속, 은희의 ‘평범한’ 삶이 잔잔하게 흘러간다. 가슴이 막힐 것만 같이 답답하고, 도저히 지나치기 힘든 몇몇 장면들도 다른 평범한 일상들 - 귀밑에 혹이 생겨 수술을 받고, 남자친구와 사귀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하는 - 과 마찬가지로, 흘러가 버린다. 그 어느 곳에서도 마음 둘 곳 없이 외롭기 때문일까,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은희는 말이 없다. 성별, 학벌과 성적, 나이에 따른 위계와 서열이 전부인 그 세상에서 그녀는 철저히 약자로서, 소외되고 착취된다.
그러나 영화 <벌새>는 은희를 ‘무력한 피해자’로서만 그려내지 않는다. 은희는 한문학원에서 자신을 존중하고, 자기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유일한 어른, 영지 선생님을 만난다. 동료 인간에 대한 존중, 따스한 관심, 친절함과 사랑. 그런 건 은희가 살아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처음으로 은희에게 알려준 사람이 영지다. 영지는 오빠에게 맞는다는 은희의 이야길 묵묵히 듣는다. 그리고 묻는다. 그럴 때 너는 어떻게 하는데. 은희는 그저 그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이라고, 반항하면 맞는 시간만 더 길어질 뿐이라고 담담히 말한다. 이후 수술로 입원한 은희를 찾아온 영지는 단호히 말한다. 이제 절대로 맞지 말라고. 누가 널 때리려고 하면,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하라고.
가족들이 모두 은희를 비난하고, 그의 오빠가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는 그 상황에서 은희는 있는 힘을 다해 악을 쓴다. 그리고 자신을 때려 온 오빠에게 그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날 선 말을 내뱉는다. 비록 오빠가 그녀의 뺨을 때리며 은희의 고막이 찢어지지만, 은희는 자신을 향한 폭력에 더 이상 참고 견디지 않을 것임을 그렇게 선언한다.
가부장인 은희의 아빠, 그리고 은희를 때리는 오빠. 영화는 그들의 폭력을 방관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직시하면서 묵묵히 그 폭력의 온당치 못함을 보여주지만 그들을 가해자, 악인으로만 등장시키지 않는다. 귀밑에 생긴 혹 때문에 제거 수술을 받아야 하는 은희. 은희가 혹 때문에 병원 진료를 받아야 되는 상황에서 아빠는 - 비록 은희에게 무정하고 아들 대훈에게 더 많은 애정을 드러내는 아빠지만 - 은희를 안심시키고 함께 병원에 가준다. 신경에 손상이 가거나, 큰 흉터가 생길지 모른다고 의사는 수술 부작용을 두 부녀에게 설명한다. 병원에 나오는 길, 그렇게 엄격하고, 권위적이었던, 그래서 은희가 늘 어려워했던 그녀의 아빠는 아이처럼 엉엉 목 놓아 운다. 그는 진심으로 은희를 걱정했고, 그녀가 수술받아야 하는 상황이 속상했다. 가족 내 권력자였고, 자식들이 섣불리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아빠. 함께 있을 때면 달리 할 말도 없고, 어색하게만 느껴졌던 아빠. 하지만 그런 그가 자식 앞에서 권위도 체면도 버리고 엉엉 울어버린 것은, 은희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를 달리 위로하지도 못하는 은희는, 우는 아빠를 그저 바라만 본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무너진다. 성수대교 붕괴 소식을 학교에서 접한 은희는 학교에 설치된 전화기로 뛰어 내려간다. 그녀의 언니, 수희가 매일 타고 다니는 통학버스가 성수대교를 지나기 때문이다. 은희는 부모에게 다리가 무너졌다고, 언니한테 빨리 연락해 보라고 울면서 소리친다. 통학버스를 늦게 탔던 수희는 다행히 사고를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식사 시간, 아빠만이 버스를 늦게 타서 천만다행이었다고 나지막이 말한 후 가족들이 식사를 시작한다. 이 가족은, 참 살갑지 않다. 언니가 걱정되는 마음에 이성을 잃고 소리친 은희도,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부모도 수희 앞에서는, 또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고요한 식사 시간이 이어지는데, 별안간 대훈이 소리 내어 운다. 그 눈물에는 걱정과 안도감 모든 것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가족들은 그렇게 흐느껴 우는 대훈에게 어떤 비난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를 가만히 바라봄으로써, 그가 느꼈을 감정을 그들 역시 느꼈음을 보여준다.
가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가족은 화목하거나 살갑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은희의 부모는 그녀가 있는 앞에서도 늘 서로를 탓하고 소리치며 싸우고, 세 형제 역시 서로의 안부조차 묻지 않는다. 서로에게 모진 말들을 내뱉고, 물리적으로까지 상처를 입힌다. 서로에 대한 친밀감이나 애정이 느껴지는 장면은 없다. 하지만 은희의 혹 수술과 입원,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굵직한 사건들 앞에서,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위하고 생각하는 가족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딸에게 무관심한 아빠였지만 딸의 수술을 앞두고는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고 신경 써주고, 친하게 지내지 않았던 언니, 누나였지만 붕괴된 그 다리에 그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은희와 대훈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누나가 멀쩡한 것에 대한 안도감, 그러나 그날 아침 희생됐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은 부모님께 나름 ‘의젓한 장남’이었던 대훈을 아이처럼 울게 했다.
삶의 고단함에 지쳐 은희의 마음에 관심 없는 엄마도, 늘 은희를 위해 감자전을 부친다. 감자전을 부치고, 은희에게 ‘감자전 있으니까 먹어’라고 말하는 그 일상적이고 평범한 행동과 말에서 은희를 챙겨주는 엄마의 마음이 느껴진다. 은희가 친구 지숙과 같이 먹을 떡을 보자기에 가득 담아주는 것도 은희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다.
이들 부모를 보면서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엮여 있는 그 관계를 생각한다. 서로 밀치고 엎고, 물리적인 상처를 내면서까지 싸우다가도, 다음날 TV를 보며 함께 웃는다. 진지한 대화나, 어떤 화해의 제스처도 없었지만 다시 함께 일하고, 밥을 먹고, TV를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대한다. 그것이 가족이라는 관계의 속성인 것처럼.
화목하지도 않고, 친밀하지도 않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을 뿐 아니라,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착취하고 학대한다. 폭력이 도처에 있다. 하지만 위태롭고, 결정적인 순간앤 결국 서로를 생각하고 위한다. 그래서, 각자가 서로에게 지니고 있는 그 사랑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족 내 명백한 위계와 그들 각자가 지니고 살아가는 고단한 삶의 무게 등은 이들로 하여금, 서로를 향한 따뜻한 애정을 감히 드러내지 못하게 한다. 걱정했다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서로에게 지닌 관심과 애정에도, 식사 시간은 고요하기만 하다. 입을 여는 건 아빠뿐이고, 그마저도 그는 가족들을 질책하는 권위자로서 말한다.
영화 <벌새>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바로 우리 곁에 놓인, 그 수많은 애증의 관계에 대한 현실적 묘사 때문일 것이다.
영화 <벌새>는 가족뿐 아니라 친구, 연인, 그리고 삶에서 만난 특별하고도 그리운 인연까지 은희가 겪는 관계들과, 관계 속에서 삶과 세상을 배워가는 은희를 그린다. 외롭고 평범한 소녀 은희는, 그렇게 관계를 겪고, 이해하고, 상처받고, 이별하고, 좌절을 겪는다. 하지만 이내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해 나간다. 은희는 영지가 당부했던 것처럼, 이제는 맞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두 개의 커다란 사건이 그들의 가족을 폭력으로부터 아주 조금은 떨어뜨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확실한 건, 이 평범하고 외로웠던, 1994년 서울을 살아가던 15살 소녀가 그렇게 조금씩 어른으로 성장해 왔다는 것이다.
[한수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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