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다양한 몸짓, 익숙한 형상 - 모내기

글 입력 2024.05.28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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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형태가 다양하다는 걸 기억하려 한다. 언어란 왜 존재하고 사용되는가. 저마다의 이유를 되감아 올라가면 결국 어떤 것이든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과 맞닿을 것이다. 표현은 분명 그 자체로 삶의 중요한 조건이자 동력이자 목적이다. 드러내고 싶은 욕구와 염원이 다양한 만큼 이야기를 담는 그릇도 무수하게 발명되어 왔다. 사진, 그림, 제스쳐, 영화 등은 인간이 섬세한 표현을 갈망한 증거다.


나에게 가장 친숙한 언어는 글인데 그 못지않게 잘 다루고 싶은 것이 있다. 몸의 움직임이다. 타고나기를 지독히 내성적인 내 성격이 물들이지 못한 것 중 하나가 춤을 향한 열망이다. 부끄럽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같이 춤추자고 하는 친구가 있으면 못 이긴 듯 따라가 몸을 흔들었다. 잘 추든 못 추든 예외 없이 재밌었고, 기왕이면 잘하고 싶었다.


여전히 춤에 대한 갈망은 남아있는데 이유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특유의 자유와 해방감이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그래서인지 움직임을 통해 소통하는 공연에 눈길이 간다. 몸을 주된 표현 장치로 결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갈고닦는 이들에게 나와 비슷한 뿌리가 있다고 생각해서다. 저마다의 언어가 보편적으로 지향하는 가치와 특정한 언어가 가진 고유한 매력을 계속해서 확인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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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모든 컴퍼니 신진안무가 발굴 육성 페스티벌 <모내기>에 다녀왔다. <모내기>는 볍씨와 같은 신진 안무가들에게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해당 공연에선 김도현, 이예닮, 정나원, 윤희섭 네 명의 안무가가 동료들과 함께 각자의 무대를 꾸렸다.

 

나는 특히 경력이 오래되지 않은 이들의 무대를 소중히 여긴다. 마모되지 않은, 보다 날것의 자기 색채가 흘러나오는 시기라고 생각해서다. 초심자는 무대를 준비할 때든 무대 위에 설 때든 기성의 문법으로 완전히 정제되지 않은 자신만의 법칙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다. 미숙하다는 말로는 결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누군가의 정수가 명랑히 빛나는 순간이다. 가장 완숙한 본질이 이 시기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를 방증하듯 네 명의 안무가는 저마다의 주제, 소재, 움직임, 가치를 품고 무대에 올랐다. 현대무용을 기반으로 한 움직임을 선보였다는 것만이 명확한 공통점이었다. 현대무용은 대중이 일상적으로 접하기 힘든 장르이고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없다는 점에서 클래식과 유사하다고 느낀다.

 

하필 그 순간에서의 행위자, 향유자, 시공간, 감정 등이 뒤섞여 유일무이한 화합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연금술과 같다. 정답이 없어서 막연하고 무궁히 매력적인 언어가 내 안에서 일으킨 화학작용에 집중하며 관람했다. 이 글은 내가 자아낸 화학식의 보고서다.

 

 

 

김도현, <바로>


 

공연은 관객을 다른 세계로 이동시키는 일이라고 여기는 김도현은 스타킹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의상과 안무를 선보이기도 하고 익숙지 않은 소리를 이용해 극적인 감정을 연출하기도 했다. 탄성적인 스타킹이 촉수가 되어 순식간에 연결되고, 끊어지고, 뒤엉키는 모습이 감정의 기이한 변모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감정은 나의 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생명체일까.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 살아가는 세포와 같은 것일까.

 

그가 옷을 벗고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에 맞춰 몸이 부서지라 춤추는 모습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이 춤과 무대를 통해서 온전한 나로 거듭난다는 의심 없는 기쁨과 자유, 그 아득한 행복만큼의 쓸쓸함이 교차한 듯 보였다. 그 순간만큼은 김도현 스스로가 초월한 세계로 향하는 통로 같았다.

 

 

 

이예닮, <주름 속의 집>


 

이예닮은 집을 형상화한 직육면체 모양의 구조물을 넘나들며 춤을 그렸다. 그이가 느끼는 집은 실험실의 일종인 것처럼 보였다. 물질적이고 고정되어 있던 집은 그이가 눕고, 통과하고, 분해하고, 어깨에 들쳐 메고, 손으로 들어 올리면서 그 맥락을 달리했다. 집의 의미를 유동적으로 바꾸는 이예닮은 집을 둘러싼 모험과 탐색을 쉬지 않으면서 순간순간의 고향을 구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이의 건축적인 움직임에서 내가 썼던 글자들이 집의 골조가 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동안 내가 쌓아 올린 집의 형상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나의 집은 이미 존재할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까.

 

 

 

정나원, <마포구 백범로 35>


 

정나원은 바닥이라는 위치성을 끈질기게 탐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그이가 바닥을 중요시한다는 사실이 좋았다. 바닥과 피부를 맞대고, 쾌쾌한 먼지를 들썩이고, 관객석이라는 권위적인 위치에서 그이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기꺼이 흡수한다는 점도 따뜻했다. 무언가를 책임감 있게 사랑한다는 건 아주 직관적이고 정확한 마음을 보여주고 합치시키는 건 아닐까.

 

그가 바닥에서부터 서사를 쌓아 올리는 걸 보며 글은 항상 천장에서 바닥으로 쓰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같은 동작으로 하염없이 바닥을 구르던 그이의 움직임을 글로 쓴다면 어떤 형상이 나타날까. 아래에서 위로 쓴 글은 탄생할 수 있을까. 글은 어떻게 바닥에서 시작할 수 있을까. 바닥은 어디일까.

 

 

 

윤희섭, <동물원>


 

윤희섭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무는 데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서로를 이분화된 타자로 나누는 경계를 허물고 싶어 하는 마음과 함께, 현대무용이라는 어려운 언어를 관객이 쉽고 재밌게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고민이 돋보이는 무대였다. 그에겐 예술성과 대중성이라는 개념 역시 배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체화된 경계선을 인지하고 해체하는 것을 즐기는 동료를 만나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다. 서로 다른 재료로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격려를 느꼈다. 상식적이고도 도발적인 그이가 몸을 통해 헤집어 놓을 보이지 않는 선들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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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계를 창조하고, 의미를 유동적으로 축조하고, 자기가 발 딛는 곳의 위치를 탐구하고, 경계를 허무는 것이 누군가의 예술이다. 그들이 보여준 대로라면 예술은 개인이 일상에서 끊임없이 수행하는 하루와 다르지 않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이 무대를 통해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한 겹 허문다. 그 자리에 누군가의 일상을 들인다.

 

어쩌면 <모내기>는 예술이란 일상을 관객의 마음에 심는 작업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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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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