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크기변환]202404092233100702_0.jpg

 

 

영화 <정순>에는 식품 공장에서 일하는 중년여성 정순이 나온다. 정순은 공장에 신입으로 들어온 동료 영수와 연애를 하게 된다. 연애 과정에서 정순은 모텔방에서 속옷 차림으로 노래하는 모습을 촬영하게 되고, 영수는 이를 불법 유출한다. 작은 동네에서 해당 영상은 직장 동료들과 지역 주민들에게 빠르게 공유되고 정순은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정순의 딸은 자신의 엄마가 당한 디지털 성범죄에 법적 대응을 하고자 하지만 정순은 끝내 법적 대응을 포기하고 선처한다. 이후 정순은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

 

 

 

폭력의 연애, 연애의 폭력


 

성폭력의 가해자는 주로 아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23년 상담 통계 및 동향 분석’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의 90%는 여성이며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 피해는 84.33%로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에 해당한다. 특히 이 중에서도 과거나 현재의 애인인 경우가 50.8%였다. 안전 이별이나 데이트 폭력, 가스라이팅 등. 개념이 마구잡이로 오용되고 있는 것 역시 현실이나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말들이다.

 


[크기변환]202404092232466751_0.jpg

 

 

영화의 시작은 지역의 식료품 공장에서 일하는 정순이 영수와 나누는 사랑의 순간들이다. 직원들의 모임에서 서로가 눈에 띄었고 둘은 연애하게 된다. 정순은 화장을 평소보다 더 공들여서 했으며 나가기 전 거울로 옷차림을 세심히 살피게 된다. 정순은 자주 영수가 머무는 모텔방에 가 시간을 보낸다. 영수는 정순이 사랑스럽다고 말하며 정순의 나체를 촬영하고 싶다고 말한다. 정순은 웃으며 거절한다. 영수는 좋았고, 영상 촬영은 싫었기 때문이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지만 정순과 영수의 상황은 달랐다. 정순은 남편과 사별했지만, 결혼을 앞둔 딸이 있었고, 자기 집이 있었고, 믿을만한 동료도 있었다. 반면 영수는 건설 현장에서 산업 재해를 당한 이후 막 이 지역의 공장에 취직한 상황이었기에 집도 가족도 지인도 없었다. 영수는 이런 자신의 상황으로 인해 정순을 의심하고 자격지심을 갖는 모습을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정순이 영수와의 연애 사실을 공장에 밝히고 싶지 않아 함을 자신에 대한 불인정으로 곡해한다.

 

 

[크기변환]정순_스틸2.jpg

 

 

이러한 오해 속에서도 정순은 영수를 좋아했고, 영수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영수의 자격지심으로 인한 말다툼 이후 화해하기 위해 정순이 선택한 방법은 영상 촬영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서로 껴안다가 속옷을 입은 채 노래를 부르는 것은 부끄럽지만 동시에 부끄러운 일이 아니기도 했다. 그래서 정순은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영수는 정순이 자신의 말을 들어줬다는 것에 만족해했다. 유포의 순간은 한순간이었다. 영수는 젊은 반장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에 기분 나빠하며 이에 반박하고 싶었다. 자신의 남성성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것은 한 여성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영상을 틀어주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정순이 허락한 영상은 이렇게 남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영수는 이 방법을 통해 반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장의 남성 관리자 집단 무리에 편입할 수 있게 되었다.

 


[크기변환]202404092233033328_0.jpg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영수와 반장을 ‘나쁜 범죄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말은 참으로 맞다. 성폭력 사건에 대한 주요한 반응 준 하나는 범죄자 단죄론이다. 대칭을 이루듯 쌍으로 나타나는 또 하나의 반응은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피해자 유죄론이다. 우리는 이렇듯 징벌할 대상을 찾고자 노력한다. 성폭력은 범죄가 맞다. 그러나 성폭력을 단지 범죄로 만들었을 때의 문제는 마치 범죄자만의 문제로 여기게 된다는 데에 있다. 그러니까, 사법의 영역이 해결해야 할 것과 사회가,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각기 존재함을 흐리게 만든다는 데에 있다. 영수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과 별개로 정순과 영수의 만남은 분명 서로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영수는 사랑을 증명해 주기를 끊임없이 바랐고, 소유하기를 욕망했고 그를 통해 애인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관계 중 애인의 모습을 촬영하고자 하는 바람은 어딘가 뒤틀린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동시에 애인에 대한 정복을 증명하는 것은 그에게 남성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영수와 정순이 놓인 상황은 복잡하다. 관람객들이 연애부터 느껴야 했던 묘한 긴장감은 그 복잡함의 결과였을 것이다. 우리는 이 소화되지 않는 복잡함과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시종일관 인물들의 맨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이 영화는 관객에게 그렇게 주문하는 듯하다.

 

 

 

잃는 것이 있는 것은 나뿐인데


 

[크기변환]202404092232515970_0.jpg

 

 

딸은 정순에게 말한다. “너무 쉽잖아. 엄마. 쉽게 해결해 주면 고마워할 것 같아? 안 그래. 엄마만 바보 되는 거야.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엄마를 바보 등신으로 보게 만드는 거라고!” 정순의 딸 유진은 엄마를 촬영한 영상이 불법적으로 유통되는 것을 확인한 직후 경찰서에 신고하고 가해자들에게 가능한 법적 조치를 알아본다. 식음을 전폐하고 집에 있는 모든 창을 닫고 누워있는 엄마 대신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다.


성폭력 피해자가 된다는 것이 개인에게 어떤 의미이든, 경찰이 해줄 수 있는 것 그리고 법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법이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은 한국의 사법 체계가 성범죄자에게, 특히 디지털과 결합된 성범죄자에게 충분한 형량을 매기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성범죄 문제의 해결이 사법 영역에서의 조치만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순이 맞닥뜨린 현실이란 이런 것이다. 정순의 영상은 온 동네에 불법 공유됐다. 처벌을 할 수 있는 것은 최초 유포자인 영수와 반장뿐이다. 그리고 이들이 감당할 처벌이라는 것은 백만 원 대의 벌금형일 뿐이다. 합의하지 못하고 처벌을 받으면 성범죄 이력에 남으니, 앞으로 취업과 생활이 불리해지긴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벌금을 내면, 그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리면, 그것으로 정순의 일상은 회복할 수 있을까?

 


[크기변환]정순_스틸1_메인.jpg

 

 

공장의 동료들은 정순의 영상을 보고 시시덕거렸다. 늙어서 주책이라는 평가를 했을 것이다. 정순이 다시 공장에 찾아왔을 때 그들은 노골적으로 정순을 무시하고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다. 동의 없이 유포되었다면 유포자와 공유한 자가 가해자라는 명제는 삶에서 이렇게 무색해진다. 정순은 탓해야 할 것을 찾기 어려워 혼란하다. 늙어서 놀아난 자신이, 영수의 기분을 풀어주려 영상 촬영을 허용한 자신이 원망스럽다. 한때 애인이었고 촬영과 유포를 한 영수가 영상을 보고 자기를 비웃은 공장의 동료들이나 지역의 이웃들보다 더 미운 것이 맞을지는 우리가 확답할 수 없다.

 

 

 

미쳐버리기 그리고 살아가기


 

영수는 몸져누워있던 정순에게 찾아온다. 현관문을 비집고 들어온 영수는 이렇게 말을 남긴다. “이렇게 일이 커질 줄 몰랐어. 당신이나 나나 잘 견뎌야지. 우리 둘 다 벌어 먹고살아야지. 사람들도 잠깐 이러고 말 거야. 나 빨간 줄 그어지면, 일 구하기도 그렇고….”영수는 진심을 전했을 거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것도 맞고, 자신도 견뎌야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맞을 것이며, 무엇보다 자신에게 빨간 줄이 그어지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수는 사과의 순간조차 정순의 안위는 관심 밖에 있었다. 그 흔한 감정 호소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한편, 가해자와 피해자로 각자 경찰조사가 진행되는 중에 가해자가 피해자의 집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려고 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무서움이기도 했다.


이후 장면에서 정순은 영수와 반장에게 합의를 해준다. 경찰서에서 합의하고 돌아온 정순은 평소처럼 반찬을 만들고 딸을 맞이한다. 경찰에게 합의 소식을 들은 딸은 엄마의 그런 태도에 열불이 난다. 그때까지 평온하던 정순은 주저앉아 울분을 터뜨린다. 네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고. 처벌이 더 낫다고 왜 네가 마음대로 정해버리냐고. 딸은 엄마의 울분에 다시 잠잠해진다. 그리고 이내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그러니까 이해하지 못해도 내가 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듯이 엄마를 쳐다본다.

 

 

[크기변환]정순_스틸3.jpg

 

 

합의를 해준 후 정순은 일상을 살아간다. 정순의 새로운 일상은 운전으로 표현된다. 정순은 운전을 배운다. 운전을 하게 되면 새로운 일을 하게 될지도, 더 이상 딸이 운전하는 트럭을 타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정순은 운전 연수를 받던 중에 영수와 반장 무리가 여전히 어울리며 다니는 것을 보게 된다. 정순은 반사적으로 그 장면을 보고 움츠린다. 정순은 거기에서 자신이 상실한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 길로 정순은 공장 출근을 한다. 그 누구도 정순을 반기지는 않지만, 정순은 태연하다. 반장은 당황하여 제대로 일도 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정순은 마침내 공장의 집기류를 모두 던져버리고 뒤에서 공장 안 모두가 낄낄거렸을 영상 속에서 부른 노래를 불러준다. 그 노래는 정순이 좋아하는 노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노래가 되었을 것이다. 영상을 찍었을 때 정순을 피해자가 아니었다. 정순은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일지라도 기쁘게 부른 노래였다. 그렇게 정순은 다시 자신의 노래를 되찾아 온다. 그들이 준 수치는 거기에 두고 자신의 노래를 챙겨 나온다. 당당한 정순의 모습은 수치는 준 자들의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공장 직원들이 보기에 정순은 미친 여자다. 다 늙어서 남자를 만나질 않나,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부끄러운 영상을 찍질 않나, 법적 대응도 끈질기게 안 했는데 공장에 나타나서는 그 노래를 불러대지 않나 한마디로 어딘가 구린 여자이다. 정순이 만든 헤프닝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행위는 그 무엇도 해결하거나 제대로 갈무리 짓지 않으며 산발적으로 벌어지기만 하지 않는가. 마지막 정순의 노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영화다운 순간이었다. 법은 충분하지 않았고, 사회는 무책임했으며 개인은 병들었다. 그리고 개인은 병들기를 거부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위에서 자신의 존엄을 되찾기로 자기 혼자 결정해 버렸다. 그게 전부다. 정순은 이제 직접 운전을 한다. 정순의 노래로 글을 마치며,


어느새 지난 지도 모르게 또

희미해져간 기억들이 다


잊어버린지도 모르게 난 또

그새 지나가 그저 지나가


세상에서 잊혀 지나 가느냐

모두 지나가 모두 지나가


좋은 사람으로 남길 바라오

모두 떠나가 모두 떠나가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