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지지가 놓여 있다. 우주 저 너머에서부터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거리를 날아 이곳, 지구에 도착한 편지. 이름 모를 한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훔쳐본다. 수 광년의 역사를 머금고서 조용히, 그리고 살포시 내려앉은 별들의 이야기를.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우주를 날아온 열두 통의 편지, 그 속에서 교차하는 우주 전쟁과 애틋한 로맨스. 배명훈 작가의 '청혼'이다.

거대한 우주에 놓인 두 존재
"사랑한다는 너의 말에 단 한 순간도 망설임 없이 대답해도 너에게 닿는 데 17분 44초가 걸리고 그 말에 대한 너의 대답이 돌아오는 데 또다시 17분 44초가 더 걸리는 지금의 이 거리를 두고 내가 가장 숨 막히는 게 뭔지 아니? 그건 대답이 돌아오기 전까지의 그 긴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갑갑함이야." (35~36p)
지구에서 180시간 떨어진 우주 공간에서 군 복무 중인 '나'는 지구에 살고 있는 '너'와 '장거리 연애' 중이다. 두 사람은 멀어지는 몸의 거리만큼 살아온 환경의 거리 또한 멀었다. 보통은 멀어지는 만큼 소홀해지기 마련인데, 이 두 사람은 서로의 다름을 껴안고 더 단단해진 듯 보였다. 둘 사이에 남겨진 공허 따위로 쉽게 저물지 않을 만큼 그 사랑은 견고했다.
우주 태생인 '나'는 지구 태생인 '너'를 비롯한 지구인들의 다른 모습들을 이야기한다. 우주에는 방향이 존재하지 않아서 위와 아래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부터, 중력에 적응하지 못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까지.
지구에 있는 모든 것들은 중력에 의해 '고정'되어 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방향'을 가지고, 뚜렷한 목적지를 가지고 나아간다. 그러나 우주는 끊임없이 팽창한다. 자유롭지만 공허하다. 끝이 어딘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무궁무진한 공간에서, 나 자신을 이정표 삼아 헤엄쳐야 한다.
우주 전쟁
"그건 정말 현실감 없는 싸움이었어. 소리라도 들렸으면 좀 달랐을 텐데. 우주에는 대기가 없어서 밖에서 아무리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도 이 안은 그저 고요하기만 해." (64p)
'전쟁터'
우리는 자연스레 소리와 함께 상상하게 된다. 도시가 무너지는 소리, 매섭게 울부짖는 무기의 소리, 절규하는 사람들의 소리…. 하지만 우주에선 이 모든 것이 들리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전장인 셈이다. 모순이 따로 없다. 수많은 사람의 생사가 빛의 속도로 판가름 난다. 아비규환의 전장이지만, 그들의 비명은 물론, 잔인하고 날카롭게 뻗어나가는 무기의 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진공 상태의 우주는 흔적 하나 없이 평화를 유지할 뿐이다.
지구의 방식으로 우주의 전쟁터를 머릿속으로 그려 본다. 소리 없이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함선, 우주의 스케일로 뻗어 나가는 입체적인, 그렇지만 방향은 알 수 없는 전술, 요란하게 반짝이는 수천 개의 빗줄기와 흩어지는 불꽃들. 잔혹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별이 되는 거리
"우리는 평상시에도 이 깊고 깊은 우주 한구석에 조용히 침몰해 있어." (53p)
두 사람은 아득히 멀어지는 공간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를 맺는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어쩌면 가장 가까이 머물러 있음에도, 외로움을 삼키며 관계를 갈구한다. 우리는 각자 우주가 되어, 서로 팽창하며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행성 크기의 공간에, 그러니까 누군가에게는 세상 전부일 수도 있을 만큼 거대한 공간에 홀로 남겨져 있다는 것. 그래, 그건 조난이야." (59p)
우리가 사는 지구도, 우주 어딘가에 떠 있는 함선도 우주는 그를 모두 집어삼킨다. 행성과 행성을 오가는 기술력을 가지고도 우주에 흠집 하나 낼 수 없다. 거대한 우주 공간에서 우리는 모두 점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작은 점을 '별'이라고 정의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별이 되는 거리,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그 사이의 공백과 허무. 두 사람은 그 공간에 선을 그어 메운다. 우주에서 가장 작은 별자리를 이루어,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낸다. 끊임없이 팽창하는 우주에서, 계속해서 멀어지는 중일지도 모를 와중에, 그들은 서로에게 별이 되었다.
별은 빛이 저물수록, 어둠이 짙어질수록 밝게 빛을 낸다. 우주가 텅 비어있는 덕분에, 둘 사이에 메꿀 수 없는 공백이 가로막고 있기에, 두 사람은 더 밝게 빛나며 서로를 알아볼 것이다. 낭만적이면서도 경외로운 사랑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고마워, 그리고 안녕.
우주 저편에서 너의 별이 되어줄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