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solo album] track10.

글 입력 2024.05.0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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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 by Yang EJ (양이제)]

 

 

[NOW PLAYING: Fire - Arthur Brown]


여러분은 '보다'라는 행위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보다'는 (1)"눈으로 대상의 존재나 형태적 특징을 알다", (2)"책이나 신문 따위를 읽다", (3)"대상의 내용이나 상태를 알기 위하여 살피다", (4)"눈으로 대상을 즐기거나 감상하다" 등을 뜻합니다. 이 외에도 20가지가 넘는 뜻과 용례가 있으니, '보다'라는 단어가 우리의 일상에서 얼마나 넓게 활용되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겠더군요.


가장 단순한 의미로서의 '보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요.


이 '보다'는 말 그대로 사물이 주는 시각 정보를 눈으로 인식하는 행위입니다. 앞서 언급한 '보다'의 정의 중 (1)~(3)까지가 이에 해당할 수 있겠습니다. 어렸을 때 들었던 과학 수업을 떠올려 봅시다. 사물의 형태가 사람의 각막, 홍채, 수정체를 지나 굴절되어 망막에 상이 맺히고 맺힌 상은 시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된다…라는 식의 설명을 들은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 과정에서 자아와 생각은 개입되지 않으며 각각의 인체들은 기계적으로 제 역할을 수행해낼 뿐입니다. 인체는 정보전달이란 주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능으로써 작동합니다. "눈으로 대상을 즐기거나 감상하다"는 (4)의 정의와는 달리, 주관이 없는 사실에 충실한 행위라 볼 수 있겠습니다. 아뇨. 과연 이 '보다'가 왜곡 하나 없이 사실 그대로를 담아내는 행위가 맞을까요?


어릴 때 수업을 들으며 가장 의아했던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교과서에 실린 그림에 따르면 물체의 상은 수정체를 지나며 한 번 굴절을 겪습니다. 저는 이미 굴절을 겪은 상이 과연 사물 본연의 모습이 맞을지 의문스러웠어요. 어쩌면 '보는' 것은 사물의 형태를 파악하기보단, 사물을 왜곡시키는 일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단 의심이 고개를 들었지요. 사람의 인체는 애초에 사물을 오해하고 자의로 해석하도록 구성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환경·가치관·호불호·개성에 따라 세상의 실체를 굴절시키느라 사물의 본질을 아는 이는 생각보다 없을 수도 있겠다고 말입니다. (물론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저 혼자만의 주장입니다.) 저는 트랙시리즈 동안 환경, 가치관, 개성이란 굴절매체들을 묶어 '욕구'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을 봅시다. 이 둘은 서로 상이한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각각 다른 '수정체'(굴절매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자는 남녀 사이에 연인-결혼-육아라는 일정한 단계가 있다고 믿습니다. 스킨십은 연인들끼리 사랑을 증명하는 행위며, 연인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는 만큼 결혼서약에 근거하여 상호독점적이어야 합니다. 또한, 서로는 서로에게 꾸준히 시간을 쏟을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트랙시리즈의 주인공인 오른쪽의 인물은 사정이 다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쳐야 할 단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르는 쪽에 가깝죠. 그렇기에 그의 행동은 다소 무례하고 건방지며 도발적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는 서로 간에 벌어지는 모든 행동을 놀이의 연장선으로 봅니다. 유희는 즐거움이 최우선이기에 책임감과 의무수행이란 가치는 등한시됩니다. 책임과 의무가 없으니, 관계가 반드시 상호독점적일 이유도 없습니다. 결국 이 둘은 정반대의 욕구를 지닌 셈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둘 사이에 갈등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둘은 명랑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는 두 인물이 서로에게 느낀 친밀감을 욕구(수정체)를 통해 굴절시키며 왜곡된 상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둘의 유대를 전조(前兆)로 바라보았습니다. 친밀감이 깊어질수록,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기 위한 조건이 충족되고 있다 여겼습니다. 훗날, 우리는 연인으로 '진화'하게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한편, 주인공은 유대를 '여기까지 해도 된다'는 허가와 승낙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사람은 각자가 그어놓은 선이 있습니다. 즐겁다면 모든 것을 놀이로 취급하는 주인공에게 사람마다 다른 이 한계선이 까다롭기만 합니다. 재밌자고 한 행동이 불유쾌한 결과를 낳는 일도 빈번했지요. 그러나 자신이 어떤 일을 하든, 여자와의 유대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보통은 질려서 떠나갈만한 일이었을 텐데도요. 이로 인해 주인공은 그 또한 자신처럼 즐거움에 있어 '관대한' 사람이라 기대하게 합니다. 아무리 많은 일이 있고,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친구로 남아있어 줄 만큼 끓는점과 어는점이 자신과 동일할 사람이라고요.

 

결국, 두 인물은 '사이가 좋다'는 현상을 각각의 욕구에 맞게 왜곡시키고 제멋대로 일그러뜨렸습니다. 서로의 망막에 맺힌 상이 어떤 모양인지 둘은 아직 알 수 없으니, 갈등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당장에 둘이 느끼는 유대감도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 문제 되지 않습니다. 다만, 이 굴절된 상에 인물들이 괴리감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갈등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겠죠.

 

 

 

양은정 에디터태그.jpg

 

 

[양은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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