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그레고르 잠자라는 남자가 자고 일어나 스스로가 벌레로 변한 것을 발견하는 상황으로부터 시작해, 자신과 가족의 변화를 견뎌내다 결국 벌레인 채로 사망하는 과정을 그려낸 단편소설이다. 인간 존재의 의미와 절대 고독을 사유했던 카프카는 작가 본인의 경험과 고민을 뛰어난 문학성으로 녹여냈고, 독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문투성이인 이 글을 읽으며 여러 해석을 내놓는다.
소설의 서두에서 그레고르는 뒤숭숭한 꿈을 꾸다가 깨어나 벌레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발견한다고 서술된다. 그렇게 갑작스레 변한 그는 죽고 나서조차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며, 벌레가 된 이유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설명되지 않는다. 이렇게 해결되지 못한 당혹감은 자연스럽게 독자의 숙제로 남겨진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된 이유는 그의 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평소 가장 신경을 쓰고 있던 것이 아버지의 빚을 청산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것, 그리고 동생의 음악 학교 진학이었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가정의 경제 상황에 대해 책임감과 불안감을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레고르는 자신이 제때 출근을 하지 않고 지루한 출장을 견뎌내지 않으면 회사에서 자네 자리가 그다지 안전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 않냐는 사장의 말마따나 언제 다른 인력으로 대체될지 모른다는 불안정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만일 그가 꾸었다는 뒤숭숭한 꿈이 이러한 불안을 반영한 것이었다면, 그가 이런 꿈을 자주 꾸었고 악몽에서 깨어나도 그때마다 고루한 현실은 그대로였다면 그레고르는 매일을 불안 속에서 살아야 했을 것은 명백하다. 삶의 목적이 타인의 부양에 있고 생산력과 노동력으로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무능력해져도 가족들이 자신의 존재만으로 스스로를 인정해줄런지에 대한 끝없는 불안이 그를 벌레로 내몰고 간 것이다.
그렇게 벌레가 된 그레고르를 가족들은 웬만하면 마주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을 할 수 없는, 즉 생산능력을 상실한 흉측한 존재를 가족들은 더이상 진정한 가족의 일원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그레고르는 여동생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음악을 듣고 이렇게 감동을 받는 그가 정녕 벌레란 말이냐며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그것을 시도할수록 인간으로 대우받기는커녕 벌레로서의 정체성만 명확해져 혼돈은 가중될 뿐이다. 벌레 그레고르는 더이상 혼자 힘으로 음식을 먹을 수도, 방문의 손잡이를 돌릴 수도 없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가족과 소통도 불가능하다. 물론 그레고르의 등에 사과가 박힌 것이 직접적 사인일 것이나, 이렇게 인간으로서의 실존이 불가능하고 완벽한 소외의 상황에서 지친 그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으로 향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달랐다. 그들은 적어도 그레고르를 벌레의 탈을 쓴 ‘인간’으로 대우할 수 있었다. 그와 대화할 수는 없었으나 그들이 원한다면 그레고르가 지각능력이 있는지, 자신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지에 대한 확인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한 관심은 그를 신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몰아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결국 그레고르와 공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일 때 느꼈던 불안함을 해소한 그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선택한 것은 그레고르지만 그 선택을 내버려두고, 오히려 부추겼던 것은 그의 가족이다.
이처럼 카프카가 <변신>에서 묘사하는 가족은 서로를 존재 자체로 사랑하기 이전에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관계로 나타나진다. 경제력, 즉 생산력의 정도에 따라 나누는 사랑과 존중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은 그레고르와 여동생의 위치가 바뀐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쓸모 없다며 구박당하기 일쑤였다던 여동생은 일자리를 구해 돈을 벌면서도 모두가 기피하는 그레고르의 식사 처리와 방 청소를 도맡아 하며 가족 내에서의 대체 불가능한 입지를 길렀고, 이제 ‘저것’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며 그레고르의 호칭을 지우고 가족 내에서 완전히 추방하는 데 앞장선다. 그에 비해 그레고르는 가족들의 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고, 심지어 하숙인들을 쫓아내기까지 했으니 가족들의 입장에서는 그에게서 벗어나거나 그를 내쫓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레고르가 죽자 나머지 가족들은 교외로 떠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꾼다. 언뜻 잔인해 보이는 이 가족의 행태는 기존에 알던 가족에 대한 사랑, 절대적인 애정과는 달리 자본주의의 시대에서는 아무리 가족 관계라도 ‘돈’을 떠나 생각할 수는 없다는, 돈에 따라 가정에서의 지위와 쓸모가 결정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레고르는 스스로의 불안과 사회가 떠민 상황으로 벌레로 변하였으나, ‘변신’한 것은 그레고르의 외형뿐만이 아니다. 아들에게 치명상을 입힌 아버지나, 그레고르의 변한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머니, 그를 가장 먼저 내쫓는 여동생 또한 기존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신’했다. 단순히 존재만으로는 생산력이 사라진 그를 사랑할 수 없었던 가족들은 죽음으로 내몰린 그레고르를 방치했다. 인간이 돈을 벌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된 것은 인간으로서의 실존이 불가능하게 된 상황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린 일종의 환상적 장치였으나 우리는 벌레가 되지 않아도 충분히 실존을 잃을 수 있는 위기,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언제든 그레고르가 될 수 있으며, 그의 가족들이 될 수 있다. 우리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고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고 싶다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돈보다 더 큰 가치인 인간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인정과 사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