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새해 보는 시집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4.12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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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의 시집 <날개 환상통> 영문판(Phantom Pain Wings)이 지난 3월 전미도서비평가협회 시상식(NBCC Awards)에서 번역시로선 최초로 수상의 영예를 얻었다고 한다. 시와는 친하지 않지만, 오직 언어의 재련을 통해 의미를 길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시인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번역을 통해 굴절의 과정을 거치고도 시는 여전히 같은 시일까? 그런 궁금증은 한편에 두고 원어에 대해 시인과 같은 감각을 공유한다는 특권을 음미해 보고 싶었다.


40년을 훌쩍 넘게 시 쓰기를 계속해 온 시인의 세계는 두텁다. 시인은 고개를 젓겠지만. (“한 사람의 문학의 모습은 그 사람이 쓰기를 지속한 시간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서시를 읽으며 나는 시를 읽는 법을 모르는군, 깨달았다. 시인은 또다시 고개를 저을 것이다. (“시가 어렵다고 말하는 독자는 시를 읽으면서 시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지요. 사실 시의 독자는 시가 내쫓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야 하는 겁니다.”) <날개 환상통>을 더듬어 읽으며 일단 시인이 ‘오직 언어의 재련을 통해 의미를 길어내는’ 사람이라는 나의 어림이 틀렸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낱자, 단어, 어구, 시행을 꼭꼭 씹어도 뜻이 그 자리에 없었다. 도망가는 의미를 쫓아 뛰어가는데, 목에서 쇠 맛이 나도 오래달리기는 끝나지 않고, 혹은 그렇게 달리는 줄 알았더니 다리가 없더라는 악몽을 꾸는 것도 같았다.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새하는 순서

그 순서의 기록


- 새의 시집 中

 


시집을 여는 첫 연에서 이 시집은 책은 아니며 “새하는 순서”의 기록이라고 한다. ‘새하다’는 우리가 모르는 생소한 어휘가 아니라 날개 달린 그 ‘새’에 조사 없이 동사 접미사 ‘-하다’를 붙여 만들어낸 말이다. 1부 ‘사랑하는 작별’의 모든 시에는 새가 등장한다. 이후에도 ‘새하기’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는 줄곧 돌아온다. 그래서 (정규 교육과정에서 익히 배운 방식대로) 열심히 고민했다. ‘새’는 무엇인가? 새가 하는 것도 아니고, 새를 하는 것도 아니고, 새‘-하는’ 것은 무엇일까? 옳든 그르든 답을 내려야 이 시집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내내 생각이 개념의 범주를 바쁘게 넘나들었다. 그래, 심지어 나는 ‘바쁘게’ 생각했다. 그러나 골몰할수록 ‘새=시’, ‘새하다=시 쓰다’, 따위의 등식은 이 시들에 걸맞지 않았다. 계속 미끄러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김혜순 시인의 인터뷰집 <김혜순의 말 - 글쓰기의 경이>를 들춰보았다. 시인과 마주 보는 대화의 물꼬를 틔워 줄 만한 단초만 슬쩍, 정말 슬쩍 훔쳐 갈 생각이었는데 웬걸, 정신 차리고 보니 시론 강의실에 앉아 있는 꼴이었다. 그것도 맨 앞줄에, 속기사처럼 모든 말을 다 받아적을 기세로. 내가 시의 세계를 모른다는 건 새삼스러울 게 없는 사실이지만, 내가 모르는 시의 세계가 생동하고자 하는 치열함으로 그들먹하다는 건 생경한 일이었다.


우선 김혜순 시인에게 “은유, 직유는 일종의 판단 형식”으로, 위에서 군림하여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대상을 재단하여 ‘체포’해 버리는 일로 여겨진다는 것. 당연히 ‘새하다=______’라는 틀로 그의 시를 잡아보려는 시도는 무용했다. 다시, 그가 ‘새하듯’ 나도 새하는 순간을 떠올리며 시집을 펼쳐 보았다.

 

 

내가 태어나서 죽었다는 그런 흔한 얘기다

내가 그만하라고 다른 얘기 좀 하라고 해도 다 내 얘기만 하는 새


다른 얘기 좀 하라고

이를테면 내가 늘 같은 하이힐만 신고 출근하고 퇴근하지만

같은 공원 같은 나무 아래에 이르면

늘 왈츠를 한번 추고 간다는 얘기 같은 거

그 나무 아래서 달을 안아보는 동작을 여러 번 해본다는 얘기 같은 거

그런 거 좀 하랬더니

 

나는 새 속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 반대가 아니라

나는 새 속에서 죽었다고 했다

그 반대가 아니라

나는 태어나서 죽었다고 했다


- 새의 반복 中

 


‘새하기’는 시인에게 피할 수 없이 반복되는 일이다. 시인은 태어나기에 새하고 새하기에 시인은 죽는다. 또 시인은 “네 피가 새의 피로 새로 채워졌”으면, “내가 되고 싶은 네가 네 몸에서 나가고 싶어 안달했”으면, “네 안의 새들이 찬란했”으면, 한다(찬란했음 해 中). ‘새하여’ 태어나서 죽는 일은 “ ‘내’가 죽어 ‘너(희)’가 되는” 사건으로, 당신 또한 새하여 불붙을 만큼 찬란하길 시인은 바란다. 시는 “대상 앞에서 대상이 죽기 전에 시인이 죽는 기록”이라고 말했듯, 이 순간 타자에게 닿으려 자신을 버리는 일을 시인은 기록한다.


 

왜 엄마를 태어나게 하고

왜 죽게 하는 거야

 

매일매일 내 몸을 조여오는

이 새장을 벗지 못하는 나는

 

전적으로 바닥에 의지해 사는 나는


트램펄린

트램펄린



이 지구는 자전과 공전이라던데

내 치마처럼 훌러덩 돌기만 한다던데

왜 죽어? 왜 죽어?


온몸을 찌르는 잉크처럼 나를 적시는 달빛

이 빛을 다 베면 죽음이 멈출까


- 바닥이 바닥이 아니야 中

 


시인은 대상이 숭고하거나 아름다워서 닿으려는 것이 아니다. 무의미하게 필멸할 존재의 죽음의 순간을 함께 비탄하여 연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무상하다. 예컨대 나는, 어머니가 난치의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일상을 잠식하는 슬픔에서 헤어 나오려고 되뇌었더랬다. 요절하지 않고서야, 모친상은 누구나 겪게 마련. 이후의 삶이 으레 이어지듯 나 또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터. 20대 중반이면 조실부모랄 것도 없다. 어머니에게 비극적인 운명이 당도한 것도 아니고, 나에게 시련이 내려진 것도 아니다. 모두가 죽고, 어머니도 죽는다. 죽음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당연히 저런 자기 암시는 아무 도움은 안 되었다. 여상한 죽음일 뿐이라는 걸 알아도, 엄마가 죽는 순간 지금의 나는 죽어 더 이상 없을 거야, 따위의 예감은 여전하다. 그런 예감과도 같지 않을까. “이 새장을 벗지 못하는”, “전적으로 바닥에 의지해 사는” 시인은 현실에 발붙이고 살지만 “트램펄린/트램펄린”, “도약/도약”, 튀어 오르며 세상을 다 베고 싶다고 말한다. ‘슬픔인지 불안인지 모를 무엇이 하는 안무’를 추는 기분을 알 것 같다. 그런 비탄. 죽어 사라지는 것이 허무에 그치게 내버려둘 수 없어 거듭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비탄을 시인은 계속한다. 계속 새한다.

 

시인은 가족이 ‘작별의 공동체’라고 한다. “시작을 시작”하고, “시간이 있”고, “작별이 있”고, “죽음을 시작”하는 것이(작별의 공동체 中) 결국 다 같은 말이라니 나란히 놓고 보면 얼마나 허무하여 고통스러운가. 살아서는 새해 본 적 없을 아버지를 ‘아빠, 너’라 함부로 부르며 시인은 너 또한 새할 존재, 애도하고 비탄할 작은 죽음임을 기록한다. 시인은 처음부터 줄곧 새한다.

 

 

깜깜한 집에서 하얀 숲의 거대한 기척을 느낀다

순장당한 영혼들의 숨결 같은 입김을 느낀다


- 뾰족한 글씨체 中

 

 

앞서 나는 어머니라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타자의 죽음 앞에서 새하는 감각을 짐작해 볼 수 있었고, 시작의 시작부터 이미 임해 있는 새하는 몸짓 또한 보았다. 시인은 계속하여 새하는 날개를 키우며, 귀 기울일 이 없는 미시적인 죽음의 기척을 거대하게 감각하며 다시, 새한다. 시인은 ‘우체국 여자’처럼 성실하게, “너무 작아서 우체국 여자의 책상 위에 먼지처럼 쌓여만 가”는 “보낼 곳 없는 내용증명”을 “숲을 뾰족하게 깎아서 쓴다”(어느 작은 시/그믐에 내용증명/뾰족한 글씨체 中). 그는 날개 달린 짐승도 아닌데 “겨드랑이가 푸드덕거”리는 환상통에 시달리며 영원한 리듬을 타고 “두 발이 공중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날개 환상통/리듬의 얼굴 中)


에스놀로그(Ethnologue, 언어 관련 양질의 데이터, 통계를 제공하는 사이트이다)에 따르면 2023년 기준 모국어나 제2언어로써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인구는 전 세계에 약 8,170만 명이 존재한다고 한다. 80억을 넘겼다고 추산되는 세계 인구 중 약 1%. 그래서 한국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으면 ‘한국어임에도’라는 조건이 수식으로 곧잘 덧붙는다. 하물며 그것이 시라면, 영상 문법과 내러티브의 보편성에조차 기댈 수 없다면. 그런 생각을 하며 시집을 펼쳤다.


그러나 김혜순 시인의 말대로 그의 시들은 “언어 이전의 소리, 소리 이전의 목소리”에 대한 것이다. 모래처럼 스러지고 마는 것들이 항상 주변에 있다. 그 기척은 너무 작지만 언제나 어떤 세상의 끝이다. 그런 죽음이 있었노라, ‘별의 눈빛처럼 보는 일을 쉬지 않는’ 시들이다(미리 귀신 中). 새하는 날갯짓 너머의 선연한 죽음의 세계에 비하면 언어의 경계는 사소하다. 환상통의 감각을 당신도 추체험해 보길 권하며, 시인의 시론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죽음이란 우리가 삶 속에서 무한히 겪어나가야 하는 것이고, 무한히 물리쳐야 하는 것이고, 살면서 앓는 것입니다. … 이 삶을 앓는 것을 통해 시는 인간 존재를 다른 곳으로, 더 나은 곳으로 이끕니다. … 전 세계에 미만한 죽음을 바라보고 그 하나하나의 죽음에 얼마나 큰 비탄들이 숨어 있는지, 이 비탄을 짊어진 지구가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우리의 생명들과 시간들과 날들이 모래처럼 망각의 사막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를 바라본 시들이라고 말해보고 싶습니다.

 

  

[이명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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