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황홀하게 타올랐던 100분 - 쇼팽으로 만나는 지브리 앙상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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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날씨 좋은 일요일이었다. 옷차림이 점점 가벼워지고 나들이 가기에 딱인 봄바람이 고개를 내민다. 마침 단번에 가는 좌석 버스가 있었고, 첫 클래식 공연에 대한 기대감으로 마음은 한껏 부풀었다.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오늘은 내가 가장 행복할 거야.
오랜만에 들른 잠실은 익숙한 듯 새로웠다. 롯데 콘서트홀이 위치한 곳은 건물 8층. 그전에 뭐라도 요기를 해야겠다 싶어 카페에서 티라미수와 히비스커스 티를 주문했다. 티라미수는 훌륭했지만 둘이 먹기에 양이 모자랐고, 음료는 어딘가 밍밍한 맛이 났다. 공연이 끝나고 맛있는 저녁을 먹자며 아쉬움을 삼켰다.
채비를 다 마치고 들어선 콘서트홀 내부는 꽤나 근사했다. 정면에는 커다란 오르간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빨간 실크 커튼은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좌석은 푹신하고 편안했으며 내부 공기 또한 답답하지 않고 쾌적했다. 무대에는 그랜드 피아노와 의자 세 개, 악보, 마이크가 위치해 있었다. 마침내 공연이 시작되고, 큰 박수와 함께 연주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공연 <쇼팽으로 만나는 지브리>는 비교적 우리에게 친숙한 지브리 스튜디오의 영화 속 OST에 쇼팽의 스타일이 녹아들어 간 형태이다. 1부는 지브리 음악을, 2부에서는 쇼팽의 음악을 먼저 들려주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점이 나 같은 클래식 입문자에게도 편안하게 다가왔다. 피아니스트 송영민 님의 친절한 해설도 공연을 관람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말씀 도중에 청중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짤막한 연주를 끼워 넣는 센스가 특히 돋보였다.
첫 곡은 쇼팽의 왈츠 7번 올림 다단조, 작품 번호 64-2로 시작했다. 왠지 귀에 익은 곡이다 싶었는데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피아노 배틀 씬에서 들었던 기억이 났다. 흐름을 받아 영화 마녀 배달부 키키 중 ‘바다가 보이는 마을’로 이어졌다. 좋아하는 곡이라 그만큼 기대를 많이 했는데, 도입부에서 너무도 선명한 스타카토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벌써부터 빠져버렸다. 절제된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이 곡.
바닷가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 그만 엉엉 울어버리는 한 아이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그는 말했을 것이다. 지금은 슬프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거야. 슬픔이 희석되도록 펑펑 울자, 후회 없이. 이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도 어떤 분위기일지 상상하게끔 만드는 연주였다.
두 번째 곡은 ‘원령공주’. 영화를 너무 예전에 봐서 그런가 기억나는 게 희미했다. 두 주인공의 물기 어린 눈망울이 아른거렸다는 것 정도랄까. 구슬픈 비올라 선율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원령공주의 메인 멜로디를 피아노가 아닌 다른 악기의 소리로 들을 수 있어 색달랐다. 마지막 클라이맥스, 웅장함을 터뜨리는 부분에서 연주자들의 에너지가 직접적으로 느껴져서 좋았고 더욱 몰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부의 시작은 ‘벼랑 위의 포뇨’, ‘이웃집 토토로’였다. 이전과는 달리 현악 4중주로만 진행되었는데 특유의 경쾌함이 잘 느껴졌고 나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며 즐겼던 무대였다. 이어지는 ‘화려한 대왈츠’는 봄이 다가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후에는 조금 분위기를 바꿔 쇼팽의 에튀드 3번 마장조, 작품 번호 10-3 ‘이별의 곡’이 흘러나왔는데 어찌나 슬프고도 아련한지 마치 지난날의 상처가 다시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다. 천공의 성 라퓨타 OST ‘너를 태우고’와 이어지는 분위기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좋았다. 음울하고 아련한 느낌에서 처절한 느낌으로 변화하는 음계가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웠다. 앙코르곡으로 한 번 더 들을 수 있어 황홀했는데, 저음역대 첼로의 매력을 크게 느낄 수 있어 행복했다.
첼로는 밴드에서의 베이스와 같다고 느껴졌는데, 이번 곡에서는 확실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부분이 있어 유독 인상 깊게 들었다. 이 곡이 끝나고 촉촉한 눈망울을 머금곤 박수를 더 열심히, 세게 쳤다. 훌륭한 연주를 듣고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두 손을 부닥치는 것뿐. 잘 들었다는 내적 찬사가 커다란 박수 소리에도 담기길 바랐다.
가장 기대했던 곡이자 마지막 곡이었던 ‘인생의 회전목마’. 이전에 아트인사이트에서 인터뷰를 할 때 나의 장송곡을 고른다면 이 곡이었으면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쩐지 나에겐 삶의 벅참과 추락이 공존하는 느낌의 곡이라 그렇다. 이 연주를 들을 때에도 그랬다. 쇼팽의 폴로네이즈 내림 가장조, 작품 번호 53을 입힌 인생의 회전목마는 조금 더 화려한 불빛을 지녔더랬다.
그럼에도 이 곡 특유의 음울하면서 활기찬 바이브는 그대로 묻어나서 더 와닿았다. 피아노 독주로 진행되었음에도 공간이 꽉 차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피아노 독주여서 분위기가 극대화됐다. 듣는 내내 행복과 절망 사이를 줄다리기했다. 연주가 끝난 후에는 가슴속 먹먹함을 감출 수 없었다.
공연 <쇼팽으로 만나는 지브리> 이후 유튜브에서 클래식 음악을 종종 찾아 듣는다. 이를테면 쇼팽의 즉흥환상곡이라든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라든지, 드뷔시의 달빛이라든지. 클래식은 현대의 음악이 건드리지 못하는 마음 한구석을 쓰다듬는다. 앞으로도 자주 그럴 것 같다. 그리고 다짐했던 바를 이뤘다. 나는 이 공연을 관람한 날, 이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다.
[김민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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