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지움으로써 -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

부재의 존재감
글 입력 2024.03.18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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썼다 '지우'는 것, 그리고 있었던 것이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것.

 

그 사이 공통점이 있다면 존재와 부재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각각의 단어로써 쓰임을 얻게 되는 것은, 대상의 부재 이후 그것의 존재감을 인지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황에 대한 이해 때문이다.


'지우다'라는 말은 언뜻 쓸쓸하거나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존재감'을 이르는 단어임을 실감하게 되면 또 다른 독특한 감상으로 이어진다. 특히나, 화이트보드에 있던 낙서를 슥슥 지우는 것처럼 간편하진 않은, 쉽게 말하면 '공들여', '애써' 쌓아온 것을 지울 때는 더욱 그렇다.


눈에 보이는 가장 위의 표면부터 차근차근 깎아내린다는 것은 아래의 것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지우는 행위 자체의 초연함, 지워냈음에도 남은 것을 통해 실감하게 되는 지워진 것의 존재감 등 그저 쌓기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감각을 직감할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집어낼 수 있는 키워드는 직감, 초연함, 존재감이다.


작품에 대한 정보 없이 직면했을 때, 보통 그것의 창작 계기나 배경, 활용한 도구나 기법, 드러내는 형태 등을 유추하면서 보기 마련이다. 책을 통해 이상남의 작품을 처음 접한지라 나는 그의 사전 정보를 먼저 접한 셈이 되었지만, 내가 우연히 이상남의 작품을 보았다면 평소와 달리 그저 멍을 때렸을 것 같기도 하다.


도서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 속에서 소개하는 '이상남' 작가와 그의 작품들은, 마치 작동하는 기계와도 같다. 그런데 그림만 보고서는 그 작동 원리나 제작 배경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 이유를 들자면, '운동성'이 눈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그림 앞에 서서 관찰하다 보면 멍을 때리게 되고, 그림 속 도상이 '작동'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분명 멈춰 있는 것인데도, 움직일 수 없는 '고정된' 형체임에도 그것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그려보게 된다.


'감응한' 것이다. 평면 속 담긴 여러 형태의 원과 선들은 그들 사이 힘의 차이에 따라 서로 직접적으로 감응하고, 관객들은 평면과 그들 사이 존재하는 관계와 아우라에 감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감응'의 과정은 작가 이상남에 의해 철저히 계획된 것이며 그것에 의해 관객은 '작동하는' 회화의 모습을 그저 바라보게 된다. 말하자면 이상남과 이상남의 회화, 그리고 관객이 존재하는 그 공간 자체가 새로운 장이 되는 것이다.


감응을 만들어내기 위해 한 '깎아내기'는 인고의 작업이다. 그러나 책 속에서도 설명하듯이 여러 도구와 기법을 활용하여 작가의 손으로 행한 것임에도,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그 노력이랄 것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린 이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붓이 지나간 길이 작품 상에서 보이면 그것은 붓을 쥔 자를 연상하게끔 하는, 그가 만들고자 했던 예측 가능한 '안'을 추측하게끔 하는 장치가 된다. 그러나 그렸음에도 그린 것 같지 않은, 그린 것임에도 '깎아낸' 것과 같은 물성을 지니는 초연한 회화는 이전에 본 적 없는 감상의 장을 만든다.


있던 것을 없어지게 한 것이 아니라, 쌓은 것을 지움으로써 지워진 것의 존재를 반증한 것이 된다.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 회화가 물질로써 기능하고, 그것이 관객과 마주한 현장 자체를 감응의 현장으로 거듭나게끔 한다. 다른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작가에 의해 '육화된 정형성'. 그것과 감응하여 소통하는 관객이 부여한 '움직이는 듯한 고정체'라는 가치는 그것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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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을 향유하다 보면 마주할 수밖에 없는 고민들이 있다. 작품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어느 집단의 특징을 띄는지, 어떤 기법을 사용하였는지에 대한 판단이 과연 중요한가를 되묻게 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달까. 정립되었다고 생각한 기준들이 셀 수 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종내는 혼란 속에 서게 된다.


다른 것보다 '현장 속 감응'을 넌지시 제안하는 이상남의 회화를, 도서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을 통해 만날 수 있어 기쁘다.

 

 

[유서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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