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미지를 “츄잉”하기 -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 [도서]

글 입력 2024.03.17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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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를 Chewing 하기


 

우리는 이미지를 ‘본다’고 말한다. 이미지를 마주할 때 ‘눈에 담는’ 과정이 가장 먼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직접 보기 전부터 작동할 수 있다. 예컨대 미술관에 가기 전부터 우리는 사전 정보를 알고 각자 머릿속에 자기만의 그림을 떠올린다. 즉 미술관에서 실제 그림을 마주할 때, 우리는 이미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와 그림을 겹쳐보고 각자 기존의 배경지식에 따라 감상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이미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상남은 이미지를 Chewing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미지를 “츄잉”할 수 있는 주체는 화가와 수용자를 모두 포함한다.) ‘보다’란 시각적인 의미만을 품고 있어 우리가 이미지로부터 얻는 어떤 것을 전부 포착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채호기는 이 “Chewing”의 의미를 철학 용어인 ‘정동’(책에서는 ‘감응’을 대체어로 제안하였다)과 엮어 설명한다. ‘씹는다’는 행위는 움직이는 것으로 운동의 의미는 물론 미각과 촉각을 포함한다. 그리고 씹는다는 건 ‘삼킨다’의 과정까지 이어진다. 즉, 이미지를 츄잉한다는 말은 “몸 외부의 것”을 씹어 삼켜 하나의 “몸”이 되려는 욕망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리되그리지-표1띠.jpg

 

 

 

'시인' 채호기가 감응해온 '화가' 이상남의 작품세계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은 같은 ‘예술가’이기 때문에 만들어낸 책이 아니다. 오히려 시인이 이미지 중에서도 회화 작품을 중심으로 미술가의 작품세계를 다룰 수밖에 없는 이유를 주목해야 한다.

 

채호기는 음악이 표상 없는 사유인 것과 달리, 시와 회화는 표상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는 언어가 가리키는 기존의 표상을 삭제하고 그 언어가 새 표상을 가리킴으로써, 기존의 표상과 새 표상 간의 격차가 만들어내는 긴장 또는 힘의 작용으로 작동한다." (43쪽) 회화는 그 자체가 표상으로, 하나의 오브제를 하나의 표상으로 창조해 내면서 작동하는 것에 주목하였다.

 

이 지점에서 이상남의 작품세계는 표상 없는 사유와 그 자체가 표상인 것을 함께 사용하는 시도가 일어난다. 특히 <풍경의 알고리즘> 시리즈에서 회화는 오히려 음악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필자는 이를 ‘음악으로서의 회화’라고 명명했는데, 그의 회화는 회화의 바깥이자 표상이 없는 음악에 위치한다. 즉, 표상 없는 사유인 음악에 회화를 두면서 이를 감응의 회화라고 부른다. 여기서 감응이 일어나는 때를 고려하자면, 이상남의 형상은 자연과 인공의 구별보다 앞서 있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기존의 질서 속에서 말할 때는 당연히 말이 안 될 수밖에 없죠. 낯선 걸 가져왔으니까요. 그러나 지속적으로 떠들다보면 말이 안 되던 것도 말이 됩니다. 강제도 투쟁도 혁명도 아닙니다. '넌지시', 이 말이 참 멋있는데, 넌지시 그 옆에 자리하게 됩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열린 세상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그러나 이게 너무 지나치게 가다보면 거대 담론이 될 우려가 있긴 합니다. 거대 담론은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진 세계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삶과 예술을 얘기할 때 혁명이나 투쟁보다도 '넌지시'라는 말이 멋있더라고요."

 

_195쪽

 

 

 

그리지 않은 것 같은,


 

책 제목인 “그리지 않은 것 같은”의 의미는, 인간이 만들어낸 회화가 아닌 ‘기계로 뽑아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이상남의 그림은 ‘재현’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그의 그림은 재현이 아니다. 재현의 기하학적인 형태 너머 생성으로서의 기계적인 힘들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베이컨이 동물적인 감각이나 힘을 표현하기 위해 동물의 형태를 재현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는 유기적 형태가 아닌 힘과 운동의 감각, 감각의 사실적 정확성 그 자체를 그린다. 그의 그림은 도상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형태들이 구분되지 않는 영역들을 나타낸다.

 

_114쪽

 

 

이상남의 그림은 그것들을 가면처럼 쓰면서 허상을 인정한다. 여기서 가면은 “최초의 모델”이 없다. 가면이 가리키는 것은 최초의 것이 아닌 다른 가면들이다. 예컨대 한 가면을 물을 때 그 대답으로 다른 가면을 가리키면서 핵심에는 도달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으로의 되돌아옴이 아니라 본질적인 불일치인 ‘시뮬라크르’만 되돌아온다. 이 불일치를 통해서 그의 작품은 끊임없이 다른 것들을 생산해 내고 우리는 그것들을 츄잉하고, 그 행위 전체가 예술이 된다.

 

 

[이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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