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흑백 세상의 무지개 소년 - 요나단의 목소리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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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다채롭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과 취향과 성격을 가진다. 자신의 개성이 매력임을 알고 소중히 여기면서도 완벽히 다른 사람과 만나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고 가족이 된다. 세상엔 특별한 관계의 고유한 색들이 진동한다.
동시에 흑백인 세상이기도 하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옳고 그름, 나와 너, ‘일반인’과 장애인, 남성과 여성. 젊은이와 노인, 이성애와 동성애, 천국과 지옥, 덕과 죄… 각자의 잣대로 구분 선을 그어 세상을 나눈다. 흰색과 검은색밖에 없는 세상은 다툼과 혐오로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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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흑백인 세상과 싸우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다채로운 세상이 더 인간적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성장하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누구든 자유롭게 자기를 떨치며 살길 바란다. 내가 살고 싶은 바람직한 세상은 그쪽이 더 가깝다.
본 글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를 빼앗긴 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룰 것이다. 흑백인 세상에 똑 떨어진 무지개 소년에 관한 이야기다. 그가 흑백인 세상에 맞추어 자신을 덧칠하고 덧칠하고 덧칠하다가 마침내 싸움을 시작하기까지의 성장이 담담히 표현된 이 만화는 나를 첫 화부터 매료시켰다. 정해나 작가의 <요나단의 목소리>는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단번에 부천만화대상 신인상과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했다.
다윗, 선우, 주영, 의영
“난 기독교 아니야. 근데 우리 아빠도 목사야.” 나는 그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선우는 신실한 기독교 집안의 독자로 태어났다. 얼마나 신실하냐면 선우의 아빠는 목사님이었고 우수한 성적이 무색하게도 공부보다 성가대 활동을 중시하는 분이었다. 선우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노래실력을 타고난 탓에 기억도 못 할 만큼 어릴 때부터 성가대를 해왔다. 선우의 인생이 변하기 시작한 건 다윗을 만나고서부터다.
다윗은 선우의 동갑내기 친구다. 교회 앞에서 우연히 만났다가 우연히 친해졌다. 다윗은 선우처럼 기독교 집안의 목사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느 순간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 문제로 부모님과 다퉈 집을 나온 뒤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혼자 살기 시작했다. 이때 다윗은 열 다섯 살이었다.
다윗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주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이도 선우와 다윗과 동갑내기였고, 마찬가지로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다윗이 빨리 집과 교회로 돌아오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다윗을 겉모습으로 평가하고 미워하는 교회 어른들의 모순에 거부감을 느꼈다. 주영이는 다윗을 너무 사랑해서 다윗이 지옥에 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고, 선우를 만나 변하는 다윗의 모습에 행복해했다. 셋은 절친처럼 친해졌다.
하나님. 어떻게 사랑을 공평하게 줄 수 있나요? 당연히 저런 사람들보다 다윗이를 더 사랑하셔야죠. 만약 다윗이를 지옥에 떨어뜨린다면 난 하나님과 싸울 거예요. 싸우고 이겨서 다윗이를 꺼내 올 거예요.
다윗은 선우에겐 없는 모습이 있었다. 교회와 그걸 강요하는 아버지는 싫었지만, 다윗이라는 그 이름만큼은 좋아했다. 부모의 종교를 거부하고 혼자 남겨지면서도 거짓말하면서 살지는 않겠다 말하는 신념과 뚝심이 있었다. 다윗은 용감했던 것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그걸 당당히 말할 줄 알았으며 자신을 거부하는 가장 소중한 가족에게서 버림받아도 그들을 용서할 용기가 있었다. 예수처럼 말이다. 그래서 선우는 다윗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다윗에게도 선우는 특별한 친구였고, 선우의 목소리를 아꼈다. 선우의 노래를 듣기 위해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교회에 가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약속의 날 하루 전, 교통사고로 다윗은 죽었다.
첫사랑의 죽음을 계기로 선우는 더 조용해졌다. 선우가 다윗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안 어머니는 그를 기숙사형 미션스쿨 고등학교로 보냈고 그곳에서 선우는 의영을 만난다. 편견 없는 선하고 다정한 아이, 의영은 딱 그렇게 설명할 수 있었다. 선우의 학교 성가대 노래에 빠져 먼저 다가갔고 선우의 룸메이트였기 때문에 비밀을 하나씩 알아가며 가까워지다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의영은 다윗의 죽음과 성적 정체성으로 힘들어하는 선우에게 구원과도 같았다.
보통의 아이들의 보통이 아닌 사랑
<요나단의 목소리>의 가장 큰 매력은 절제된 연출이다. 대개 만화 연출에는 과장된 표정과 몸짓이 핵심인데 <요나단의 목소리>는 오히려 여백과 담담함이 연출을 완성한다. 이 만화에는 그 흔한 집중선, 효과음 하나 찾을 수 없다.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말풍선에 변주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대사가 타원에 꼬리가 달린 기본 말풍선에 담긴다. 읽다 보면 무심코 이 인물이 소리를 치는지, 노래를 부르는지, 뭘 하는지 알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는 차치하고, 영화나 드라마보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산속 어딘가의 미션스쿨에 가면 206호에는 윤선우와 조의영이 살고 있을 것 같고 다윗과 주영과 선우가 나누는 대화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하다. 정말 보통의 청소년들 같다. 물론 이들이 하는 사랑은 보통의 것이 아니지만. 시시콜콜한 농담이나 장난도 이러한 감각에 한 몫을 톡톡히 한다. 절제된 연출과 담담함, 사실감이 오히려 이 애틋한 서사에 대한 애정을 불러일으켰다. 사실적인 대사와 농담은 이 네 명의 인물이 나보다 몇 살이나 어린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쉬지 않고 일깨워주었고, ‘겨우’ 중고등학생 아이들이 보여주는 보통이 아닌 사랑에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을 더 산 나도 이렇게까진 사랑해본 적 없는데, 얘들은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는 종교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야말로 예수 같은 사랑이라 느꼈다. 조건 없는 사랑. 서툴고 나를 자만심에 잔뜩 빠지게 하는 어린 사랑. 그러나 무한한, 마치 신이 주는 것 같은 그런 진심 어린 사랑. 청소년이라 할 수 있었던 그런 사랑이었다.
다만 그 사랑을 원 없이 누릴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나이에 맞지 않은 시련을 맞은 바람에 아이들은 갑자기 어른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하는 상황에 그럴 수 없는 연령은 그 사이 어중간한 무언가로 남게 했다. 그 어중간함은 이들에게 상처였다. 이들이 다윗을 잃고 슬펐던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지만 이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흑백의 세상이었다.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고, 천하의 나쁜 놈, 불량아가 된다. 어른들은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교리를 실천하지 않고 다윗을 미워했고, 일흔 일곱 번이라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다윗의 아버지는 다윗을 집에서 쫓아냈다. 교회에 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발버둥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주영이는 흑과 백의 세상에 맞서기로 했다. 평생을 믿어온 신을 믿지 않기로 하면서. 반면 선우는 또 한 겹의 칠로 자신을 숨겼다. 선우에게는 목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을 신의 목소리로 신의 말씀을 노래해 온 선우에게 자신의 목소리는 없었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려는 엄마의 모습에 더 스스로를 감추려 했을 것이다. 하양과 검정밖에 없는 세상에서 자신은 철저한 ‘백’임을 증명해내려는 것처럼, ‘흑’의 나락에 떨어져 버림받지 않기 위해 주영이와 다윗과 신앙과 사랑과 증오에 관한 이야기를 삼켰을 것이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건 꼬리를 무는 거짓말로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주영이와 선우는 살아남았고, 동시에 다윗으로부터 각기 다른 방향으로, 멀어졌다.
목소리를 찾아서
선우는 태어나면서부터 목소리를 빼앗겼다. 생각을 할 수 있기 시작할 때는 이미 교회에 다니고 있었고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평생 신의 목소리를 대신하느라 자신의 목소리를 잊었다.
의영은 다윗보다도 선우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유일한 비종교인이었고 너무나 보통이었기 때문에 거짓말이 필요없는 삶을 살아왔다. 선우의 가정은 한색의 모노톤이었지만 의영의 가정은 난색에 알록달록했다. 의영은 흑백의 세상이 아닌 곳에 태어났다.
당연히 완전히 다른 세계의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할 수밖에 없는 선우를, 거짓말할 필요가 없었던 의영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그렇게 상반된 세상을 살던 선우의 손을 의영은 닦아주었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가 신도의 발을 닦아주듯이, 너의 신앙과 믿음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는 나에게 상관있다. 그런 말을 보여주었다. 선우는 다윗의 요나단이었지만 의영은 선우의 요나단이었다. 나의 다윗이 목소리를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3:8)
이 이야기는 흑백의 세상에 똑 떨어진 무지개 소년의 이야기다. 날 때부터 목소리를 선사 받았으나 그 탓에 자신의 목소리를 잊은 가엾은 소년의 이야기다. ‘타고난 것’이라는 건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특별하고 귀히 여겨지지만 동시에 숨 막히는 것이다. 타고난 것은 필연이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거기에 내 선택은 없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목을 긁고, 조르는 선우에게 목소리는 올가미였으리라. 이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선우는 종교에서 벗어났다. 목소리를 잃으면서, 동성애자임을 밝히면서. 그러나 믿음은 저버리지 않았다. 의영에게서 받은 사랑조차도 하나님의 대답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선우의 종교가 목소리를 덫으로 삼아 옭아매는 일이 없었다면, 흑백이 아니었다면. 선우는 목소리를 잃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종교와 멀어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늘 모두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아왔지만, 진짜 자기 모습은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는 괴리에서 선우는 외로웠다. 선우의 종교가 흑백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외로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요나단의 목소리>의 주된 이야기는 흑백의 세상과 싸우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흑백의 세상과 싸우기까지, 누군가의 요나단이었던 선우가 또 누군가의 다윗이 되어 목소리를 찾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고 숨고 덧칠하다가 어떤 계기로 용기를 얻는지. 그 성장과 상처에 관한 이야기다. 동시에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모든 부분에 사랑이 빠지는 부분은 없다. 선우가 목소리를 타고난 동시에 잊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고 그 목소리가 변한 것은 다윗을 향한 사랑과 부모의 겁먹은 사랑이었으며 다시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한 것은 비종교인 의영의 가장 종교인다운 사랑이었다. 모두가 서로에게 다윗이자 요나단이었다. 모두 서로를 자기 자신만큼 사랑했기에 남겨진 선우와 주영과 의영은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만화를 읽고 나면 사랑을 믿게 된다. 솔직히 나는 평생 무교로 살아온 사람이라 신에 대한 믿음 같은 건 잘 모르겠으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말씀만은 지당하다. 흑백의 세상을 다채롭게 만드는 건 서로를 다윗이자 요나단으로 여기는 마음이다. 그게 세상의 색을 더 다양하게 만들고 모두가 제 목소리로 자기를 말할 수 있는 당연한 세상으로 가는 제일 확실한 방법이다.
그런 마음을 닮아 선우를 만나면 의영이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 만화는 흑백의 세상에 소중한 한 방울 물감이다. 그런 쉽지 않은 결심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이 만화는 다시 한 번 일깨운다. 결국, 끝에 남는 건 사랑이고, 평생의 거짓말도 이기는 것이 사랑이라는 걸. 그리고 그게 어떤 모습의 사랑이든. 그저 사랑일 뿐이다. 죄도 병도 아닌 그 자체로 완전한 마음이다.
이것보다 의미 있는 만화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박상하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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