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균열과 붕괴의 세계에서 진행되는 보편적 성장담

글 입력 2024.02.13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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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가 후배에게 장미꽃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 날, 부모님은 아이들 앞에서 큰 부부싸움을 하고 아이들은 괴로운 듯 울고 있다. 피가 나고 주먹질이 오가는 큰 싸움이었는데도, 다음날 부모님은 거실에서 태연한 얼굴로 함께 TV를 본다. 심지어는 웃는다. 어른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세상이 아름답다는 영지 선생님의 말과는 달리, 은희가 바라보는 어른들의 세상은 이해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벌새>는 1994년을 살아가는 중학생 은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자신에게 관심 없는 어머니, 폭력을 일삼는 오빠와 진심을 알 수 없는 친구들까지. 은희의 삶은 균열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희는 그저 사랑받고 싶어하는 14살 어린 소녀이다. 폭력과 균열의 세계에서 성장하는 은희의 이야기는 평온하지만 불안하고, 보편적이지만 특별한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94년, 다리가 무너져 많은 사람들이 사라진 어느 해. <벌새>는 1994년이라는 특수한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소녀의 성장담을 통해 시대 공동의 트라우마를 위로한다.

 

 

1. 자전적 이야기가 아닌 보편적 이야기

 

(1)균열과 붕괴의 주제성

 

14살 은희의 삶은 균열의 세계이다. 가정과 사회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청소년의 세계에 놓인 은희에게 집과 학교는 세상의 전부이다. 하지만 은희에게 집과 학교는 그 어느 곳도 마음이 놓이는 ‘온전한 장소’가 아니다.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이간질을 부추기고,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라는 저급표어로 학생들을 통제하고 억압한다. 집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서슴없이 욕을 하고, 오빠는 기분이 내키는 대로 여동생을 때린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어머니는 침묵하고, 그렇게 무늬만 가족인 채 그들은 매일매일 같은 식탁에 앉아 식사한다. 집과 학교, 그 어디에서도 준거집단을 형성하지 못한 은희는 유일하게 마음 놓을 수 있는 친구 지숙과 남자친구 지완에게 애정을 쏟으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은희의 유일한 숨통처럼 느껴지는 지완과 지숙도 완벽한 관계가 아니다. 지숙은 문구점에서 함께 물건을 훔치다 걸리자 은희를 배신하고, 지완은 자기 마음대로 은희를 버렸다가 다시 돌아오는 등 은희를 혼란스럽게 한다. 은희의 세계의 균열은 이렇듯 그녀의 삶의 모든 곳에 존재한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벌새>의 사건들을 보면, <벌새>는 감독 혹은 특정 인물의 자전적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벌새>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벌새>는 동시대의 보편적인 아픔을 개인의 삶과 연결한 이야기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영화의 배경인 1994년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1994년.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과 불안이 혼재되어 사회는 뒤숭숭했다. 일상의 균열이 조금씩 존재하던 시기에 들이닥친 성수대교 붕괴 사건은 평범한 일상에 찾아온 거대한 재난이었다. 그렇다면 감독이 1994년이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별다를 것 없는 은희의 일상들은 평범하면서도 불안한 기운이 느껴진다. 가정과 학교에서의 차별과 폭력, 그리고 친구와의 불화는 어린 소녀의 삶을 뒤흔들 큰 사건임을 암시하지만, 일상의 작은 해프닝으로 생각될 만큼 배경음악이나 영상 효과 없이 평범하게 제시된다. 이렇듯 일상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가져가는 은희의 이야기는 어느 날 느닷없이 발생한 성수대교 사건과 연결되어 평범한 은희의 일상을, 또 우리의 일상을 재난처럼 느껴지게 한다.

 

<벌새>는 은희의 삶의 개인적 균열과 다리의 붕괴라는 물리적인 균열을 의미적으로 연결하여 사회를 구성하는 공동의 감정과 개인의 감정을 동일한 선상에 위치시켰다. 이러한 연결관계를 통해, <벌새>는 은희의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느껴지는 자세하고 특별한 서사를 사회 공동체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전개했다. <벌새>에서 제시된 개인과 사회의 균열의 유사성은, 이 영화가 자전적인 이야기가 아닌 내러티브를 갖춘 픽션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2) 영지와 은희: 폭력의 경험이 연결한 관계

 

<벌새>가 자전적인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모두가 체험 가능한 보편적 픽션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시대적 사건과의 이미지적 유사성뿐만이 아니다. <벌새>는 폭력이 인물들에게 가해지는 무대를 설정하여 폭력을 경험한 인물 간의 관계 통한 연결을 시도한다.

 

먼저, 은희가 겪게 되는 폭력의 주 무대는 집이다. 가장 안전하고 보호받는다고 느껴져야 할 집에서 가해지는 폭력들은 은희를 무력하게 만든다. ‘나’라는 존재보다 거대한, 상위 단계의 존재인 부모님과 형제는 막내인 은희에겐 저항할 수조차 없는 절대적인 존재일 것이다. <벌새>에는 억압을 받는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영지이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영지가 항상 공허한 얼굴을 하고, 휴학을 오래 했으며, 학원 학생들에게 민중가요 ‘잘린 손가락’을 불러주는 장면으로 미뤄 보아 그녀는 대학에서 운동권으로 활동했으며, 마음의 상처가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선생님, 여기 사는 사람들은 왜 현수막을 거는 거예요?

 집을 안 뺏기려고 그러는 거야.

 남의 집을 왜 뺏어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지?”


은희에게 있어 폭력의 주 무대가 집이었다면, 영지에게는 자본주의 사회가 폭력의 주 무대이다. <벌새>는 자기 존재보다 상위의 존재에게 억압적인 폭력을 경험했던 인물들의 관계와 그들의 진솔한 유대를 통해 세대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아픔을 위로한다. 집을 빼앗기지 않으려 걸어 놓은 현수막을 보며 은희와 영지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영화는 이들이 같은 정서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관객에게 전한다. 현수막을 걸어 놓은 사람들, 영지, 그리고 은희가 공유하는 폭력의 경험은 영화 내에서 의미적으로 연결된다.

 

 

2. 성장소설의 주제

 

은희의 본격적인 성장담은 한문 선생님 영지를 만난 후부터 진행된다. 영지가 은희의 인생에 존재하기 전, 은희는 단짝 친구에게 배신당한 경험이나, 오빠에게 맞은 경험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줄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상의 폭력과 균열에 의연한 척 침묵했지만, 원하는 것은 단지 사랑뿐인 14살 소녀의 진심은 영지와의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난다. 자기 자신의 현재 감정과 상황, 그리고 자아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 영지와의 교류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1) 분리: 가족과 멀어지며 성장의 준비단계를 거침

 

성장담은 크게 분리-전이-통합의 과정을 거치며 진행된다. 은희의 본격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게 되는 공간은 병원이다. 침샘에 맺힌 혹을 제거하기 위해 은희는 병원에 입원한다. 병원에 입원함으로써 은희는 일상의 균열인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잠시 분리된다. 삶의 거대한 축이었던 가족, 친구와의 분리 과정은 은희의 성장에 있어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렇게 은희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은희는 성장의 조력자 영지를 만난다. 병원을 찾아온 영지는 은희에게 “너 이제 맞지 마.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마.”라고 조언한다. 은희에게 영지는 자신을 동일한 인격체로써 존중하는 인생의 첫 멘토이자 스승이다. 영지의 이러한 조언을 통해 은희는 자신을 괴롭혔던 부조리한 질서와 분리되어 자아를 확립할 수 있는 준비의 기간을 가지게 된다. 시간이 흘러 은희가 퇴원하는 날, 은희는 홀로 퇴원 절차를 받고 집에 도착한다. 도착한 집에는 여전히 사람이 없다. 은희는 다시 외로움을 느끼지만, 이전과는 다르다. 

 

(2) 전이: 새로운 존재로의 이동 과정

 

은희가 병원에서의 경험을 통해 단계적 성장을 했다는 것은 퇴원 이후의 사건들을 통해 드러난다. 퇴원 후, 한문학원에 등원한 은희는 영지가 학원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다음날, 원장 선생님이 알려준 시간에 학원을 다시 방문했지만 영지는 이미 가버리고 없고, 원장 선생님께 영지에 대한 험담마저 듣게 된다. 은희는 이에 분노해 원장에게 소리치며 분노를 표출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학원에서 쫓겨나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은희는 버르장머리 없다며 자신을 비난하는 부모와 오빠에게 크게 저항한다.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자신과 자신에게 있어 소중한 것을 보호하려는 은희의 저항은 소리 없이 부조리에 순응했던 이전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 장면은 은희가 자신을 구성하던 기존의 질서를 벗어나, 새로운 질서로 이동하는 성장담의 전이 과정이다. 전이 과정에서 주체는 고통을 피해갈 수 없다. 은희는 선생님을 잃은 슬픔과 과거에 자신을 억압했던 것들에 분노하며 감정을 처음으로 표출한다. 

 

(3) 성장담의 결말: 통합 단계의 부재, 마지막 장면

 

<벌새>는 은희의 성장담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코 그녀의 ‘성장이 완료된 완벽한 모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성장담의 결말인 ‘새로운 세계로의 통합’의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은희의 성장에 있어, 영지는 조력자이면서 동시에 은희의 완전한 성장을 위해선 사라져야 하는 존재이다. <벌새>에서 보여주는 은희의 삶은 대체로 중심되는 인물들이 있다. 지숙과 지완, 엄마, 그리고 영지가 그것인데, 진정한 성장을 위해서라면 은희의 삶의 중심엔 다른 사람이 아닌 은희가 있어야 한다. 전이의 과정까지는 영지가 은희의 삶의 축이다. 때문에 영지가 은희와 직접적으로 이별함으로써 은희가 더 이상 타인을 자기 중심에 두지 않고 본인을 그 중심에 위치시켜야 하는 것이다. 결국 <벌새>에서 드러나는 성장담의 결론은 영지가 죽고 은희가 그 삶에 적응한 뒤인, 즉 영화가 끝난 이후의 은희의 시간을 관객이 추측하는 데에 있다.

 

<벌새>는 은희의 성장을 영화의 전반적인 주제로 설정하고 있지만, 성장담의 최종단계인 통합의 과정은 제시하고 있지 않다. 이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수학여행을 위해 친구들이 한 공간에 어울려 있는 모습을 은희가 평안한 얼굴로 바라본다. 이때 은희의 얼굴은 마치 영지처럼 어딘가 개의치 않는 듯한, 공허한 얼굴을 연상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평온해 보인다. 학교 안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어딘가 불편해 보였던 영화 초반의 은희의 모습과는 다르다. 은희는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는다. <벌새>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결국 은희가 자신의 둥지를 트고 이 공간에, 이 사람들에, 이 질서에 적응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영지의 존재는 사라졌지만 은희는 잘 지낼 것이며, 현재 은희는 자신의 성장이 이루어지는 과정 안에 있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이다.

 

 

3. <벌새>의 젠더적 특성

 

1994년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벌새>는 당시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일상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영화에서 가부장제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아버지는 공감 능력이 부족하며, 가족의 명맥을 이어갈 인물을 첫째 딸 수희가 아닌 둘째 아들 대훈으로 선택한다. 5명의 가족원 중 남성보다 여성의 수가 더 많은데도, 즉 여성이 소수가 아닌데도 여성 구성원들은 남성 구성원들의 편의와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노력한다. 특히, 제2의 가부장이라 여겨지는 둘째 대훈은 막내 은희를 때리며 자신의 스트레스를 푼다. 은희가 오빠의 폭력에 대해 고발해도 가족들은 무시하고, 오직 수희만이 은희의 눈을 맞추며 안타까워하지만 결국 그녀도 가족 내에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여동생을 향한 오빠의 폭력은 은희만의 것이 아니다. 은희의 친구 지숙도 오빠에게 폭력을 당하는 인물이다. 그들은 “우리한테 미안해하기는 할까?”라고 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말고는 달리 저항할 방법이 없다.

 

가족 내의 어린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영화라는 픽션의 허구적 상상력이 아니다. 실제 존재하는 사건들을 허구적 픽션이라는 장치를 통해 안전하게 고발하는 것이다. 최은영 작가의 <601,602>에서도 오빠에 의한 폭력이 가정 내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진다. 하지만 다른 가족 구성원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기거나, 피해 여성에게 책임을 지우는 등의 태도를 취한다. 소설은 여성들에게 있어 아들은 자부심이자, 자신을 안전하게 해 줄 하나의 보호막으로 상징됨을 보여준다. <벌새>에서도 이러한 남성의 상징성을 찾아볼 수 있다.

 

밤늦은 시각, 은희의 외삼촌이 은희 집에 방문한다. 외삼촌은 엄마를 보며 예전엔 동생이 공부를 참 잘했으며 자신 때문에 희생했다고 말한다. 외삼촌은 잘 지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엄마는 굳이 잘나지 않은 외삼촌이 다니는 먼 병원에 은희의 진료를 예약한다. 어린 시절을 희생되었는데도 엄마는 외삼촌을 신뢰한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안에서, 가족에게 억압받더라도 이들을 용서하고 신뢰하여야 했던 당시 여성의 현실이 영화에서 재현된 것이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안에서, 가족의 남성 구성원은 두렵고 싫지만 대항할 수는 없는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은희의 분노 장면은 이러한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의 질서를 저항하고 거부하는 ‘새로운 존재로의 성장’을 실현한 것으로 보인다.

 

 

4. <벌새>의 영화적 장치와 상징

 

(1) 도입 장면: 902호,1002호

 

<벌새>는 심부름을 다녀온 은희가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열리지 않는 문을 향해 은희는 부서져라 문을 두드리며 소리치고, 문을 올려다보면 호수는 902호. 은희는 한층 더 올라가 1002호의 문을 연다. 은희가 집에 들어 감과 동시에, 카메라는 풀숏으로 프레임을 바꾸고 복도형 아파트의 전체 모습을 보여준다.

 

이 도입부분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이는 <벌새>의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 제 집을 찾아간 은희의 뒷모습과 함께 아파트가 풀숏으로 찍히는 것은 <벌새>의 이야기가 은희 한 명의 이야기가 아닌 보편적인 전체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붕괴의 이미지적 유사성, 인물 간의 유사성에서 드러난 영화의 주제 의식이 사실은 도입 3분의 장면에서 예견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은희가 거의 울부짖으며 엄마를 부르는 행위는 은희라는 인물이 얼마나 사랑을 원하고 있는지, 그녀에게 어머니라는 존재가 얼마나 간절한지에 대한 인물의 내적 정보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2) 은희와 수희의 방 벽의 균열

 

성수대교 붕괴 사건 다음 날, 수희는 운 좋게 목숨을 구했지만, 다음 날에도 학교는 가야했기에 집을 나선다. 카메라는 방을 나서는 수희의 뒤에 놓인 벽의 균열을 포착한다. 벽의 균열은 선명하지만 테이프로 대충 처리된 상태이다. 이는 은희의 집 내부에도 곳곳에 균열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지적으로 연상시킨 것이다.

 

<벌새>의 김보라 감독은 인터뷰에서 "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우리나라는 선진국을 열망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서구에 인정받고자 하는 공기 속에서 다리가 무너졌고, 그 물리적 붕괴가 은희의 관계 붕괴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이야기를 쓰게 됐다." 라고 전했다. 붕괴의 이미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감독에게 있어, 성수대교 사건은 놓치고 지나간 것에 대한 성찰의 이야기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충 테이프 처리된 은희 방의 벽 균열은 보여주기 식으로 급하게 만들어졌던 성수대교와 연관되어, 그 이면을 비판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벌새>는 1994년을 살아가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면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삶의 균열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살아왔던 은희가 본인을 어린아이가 아닌 동일한 인격체로 인정해주는 영지를 만나게 되며 그녀의 성장 서사는 시작된다. <벌새>의 세계는 우리의 현실과 아주 많이 닮았다. 영화는 나이에 의한 위계, 성별에 의한 위계, 권력에 의한 위계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한 위계와 그로 인한 폭력을 어린 여성의 시선으로 제시하여, 삶의 부조리함과 그 부조리한 사회에서 성장해야 하는 인물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 제시한다.

 

<벌새>는 일상적인 삶을 제시하면서도, 이 이야기가 개인적이고 특수한 것이 아닌, 보편적인 우리의 삶을 의미한다는 것을 여러 방법으로 표현했다. 1994년이라는 고정적이고 특수한 시대적 상황과 사건을 꺼내면서도, 이야기를 보편적으로 만드는 것에는 여러 방법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첫째, 은희의 캐릭터적 특수성을 배제하였다는 것. 은희는 어느 것에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도, 개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은희라는 캐릭터는 서사의 주인공이지만, 모순적으로 보편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둘째, 붕괴의 이미지와, 각자 유사한 경험을 했던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보편성을 상징한 것. 셋째, 도입 장면의 시퀀스. <벌새>는 사용된 인물과 이미지, 또는 프레임 구성을 통해 ‘보편성’이라는 한가지 방향성을 향하고 있다.

 

 

벌새2.png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또 다른 주제는 바로 성장이다. <벌새>는 완벽하게 성장한 은희의 이미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영지를 찾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갔지만, 영지는 더 이상 볼 수 없고, 영지가 해준다던 말도 이제는 들을 수 없다. 영화는 허무함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결말을 가능성의 결말로 발전시켰다. <벌새>는 관객에게 영화 밖의 시간에서 홀로 성장한 은희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만든다. 결국 성수대교 사고라는 우리 사회의 공동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면서도, 은희의 성장을 희망적으로 그려내는 것에서 마치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것이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가부장제의 아픔과 균열을 이야기의 소재로 하면서도 <벌새>는 가부장제의 가해자에게 화살을 돌리지 않는다. 가부장제의 수혜자인 아빠는 무관심한 줄 알았으나 은희의 수술 소식에 아이처럼 엉엉 울고, 대훈은 수희가 죽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며 가족 식탁에서 오열한다. 어떤 부분에서는 누군가를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한 사람이지만 결국 그들도 절대적인 악인은 아니다.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감독의 세밀하고 신중한 태도는, 폭력과 억압의 세계에서도 희망과 사랑을 찾고자 하는 은희의 이야기를 위해 필요한 영화적 장치로써 작용한다. 세밀하고 따뜻한 태도로 폭력의 세계에서 성장하는 은희의 이야기는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 공동의 트라우마를 위로하고, 더불어 관객의 개인적 삶에도 위로를 건네는 이야기이다.

 

 

[차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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