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독일 뮌헨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보기 [연극-Ха́та – Zuhause]

글 입력 2024.02.12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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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침략으로 인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되었다. 전쟁은 인간이 가진 것이 오직 생명뿐임을 가장 야만적인 방법으로 들추어낸다. 전쟁 없음의 상태, 주권 인정이라는 규범은 양차대전 이후 세계가 구축한 합의점이었다. 우리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이  위협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그것이 전쟁 그 자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세계를 떠받치던 어떤 규범이 무너지고 있는 시대임을 직감하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2023년 8월 나는 독일에서 반년간의 교환학생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크라이나에 연대하는 의미를 담은 무언가를 만나면 공연히 사진을 찍었다. 죄책감일지도 모른다. 아무렇지 않게 넘기면 안 된다는 다짐이나 의지 따위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죽음이라는 것-소생할 수 없는 영원한 종결-이 이루어지는 땅 한복판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힌다는 것 자체가 어떤 기만과 함께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양되었던 여름이 지나 날이 쌀쌀해질 수로 나는 이방인으로서 이 땅에서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즈음 친구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루는 연극이 뮌헨 kammerspiele 극장에서 올라감을 들었다. 사진을 찍었던 것과 같은 마음으로 나는 연극을 보러 갈 것을 결정했다. Kammerspiele 극장이 있는 뮌헨은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지역 노선 기준 4시간, 고속열차 기준 3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오직 이 연극을 위해 일요일 오전 나는 왕복 8시간의 여정을 떠났다.

 

 

 

내부와 외부-외부와 내부


 

외화.jpg

 

 

홈페이지와 팜플렛에서는 연극이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고 소개한다. 1부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노래 공연을 배경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의 인터뷰 영상이 송출된다. 2부는 러시아인들의 무용 공연을 배경으로 러시아인들의 인터뷰 영상이 송출된다. 같은 무대에 오르지만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은 무대 준비 중에도 무대에서도 서로 만나지 않았다고 소개된다. 

 

그러나 서로 맞닿지 않는/못하는 1부와 2부의 관계를 보기에 앞서 이 연극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연극이 액자식 구성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연극에는 1부와 2부 앞뒤로 무대설치/철수 과정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무대 위이기 때문에 이는 당연히 극 중으로, 우리는 이를 배우들의 연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숨겨진 구성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연극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 연극은 1부와 2부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다. 이 연극의 대주제는 ‘무대를 올리기’ 그 자체이다. 내화 속 올려지는 무대가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의 공연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액자식 구성에서는 외화보다는 내화의 주제가 더 핵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외화는 내화의 진실성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이거나 내화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영향받는 무언가일 뿐이다. 그러나 이 연극에서 함께 공연할 수 없다는 내화는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우리가 몸 담고 있는 현실이라는 외화 위에 존재한다. 이는 의도적인 헛갈림을 유도한다. 무대 안과 무대 바깥은 이렇게 연결되며 관객들에게 “그래서 무엇이 내화이냐?”를 질문하기에 이른다. 관객들은 이 질문에 쉽사리 대답할 수가 없다.  그렇게 스스로 외부에 있다고 생각한 관객들은 이 극의 동조자로 끌려온다.

 

 

 

내부: 물과 불의 교차


 

우크라이나 불.jpg

 

 

1부 우크라이나인의 공연은 전통 민요로 구성된다. 노래의 중심에는 나무가 한 그루 놓인다.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을 이어가다 노래를 시작한다. 우크라이나는 불이다. 그들은 목소리를 낸다. 누군가 선창을 하면 더 큰 목소리가 들불처럼 돌림 노래로 돌아온다. 찬 바닥에 앉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그들은 불을 피우기에 이르다. 불이 타오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부와 2부 전체 무대에서 입을 여는 것은 오직 우크라이나인들이라는 것이다.

 

 

러시아 물.jpg

 

 

러시아는 물이다. 2부의 분위기는 1부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1부의 공연자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불 주위로 모여들었다면 2부의 공연자들은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에게는 남성인 감독이 존재한다. 이 감독은 러시아의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1부 우크라이나 공연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나무를 뽑아 없앤다. 형식이 엄격한 발레 공연인 만큼 무용수들은 감독이 지휘하는 대로 몸을 움직여야 한다. 공연은 무대 위의 여성들이 올리지만 실제 소통은 일방향적인 셈이다. 

 

그러나 극은 러시아 공연자들의 수동성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감독이 물을 따라주는 장면에서 였다. 감독은 공연자들이 물 마시는 것까지도 지휘하고 명령하고자 한다. 여성들의 손에 컵을 지우고 물을 따른 뒤 마실 것을 종용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물에 대한 무용수들의 반응이다. 누군가는 감독이 시키기 전에 물을 마시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감독의 눈을 피해 물을 마시지 않기도 한다. 엄격한 규율 속에서도 그들은 각자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2012년 이후 러시아 양심수의 숫자는 3442명. 이 중 1157명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투옥된 사람의 숫자이다. 

 

 

 

외부: 비참함과 무참함을 함부로 화해시키지 않기


 

이 연극에는 커튼콜이 없다. 커튼콜은 연극 내에서 가장 연극적 요소이다. 극 중 인물이었던 이들이 사실은 배우임을 공개적으로 보여내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연극의 내용이 어떠했든 간에 환한 미소와 박수로 배우를 맞이한다. 이처럼 커튼콜은 극 중 내용이 모두 허구였다는 것을 인정하며 극의 긴장이 공개적으로 해소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 연극에는 커튼콜이 없다. 대신 극의 마무리는 무대 프로젝터에 배우들의 이름이 나열되는 것으로 갈음된다. 이러한 연출에 나를 포함한 관객들은 모두 당황했다. 어두웠던 무대가 환해지고 극이 마무리되었을 때 우리는 관객으로서 언제든 박수칠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관객들은 커튼콜이 없다는 것을 이내 받아드리고 눈치를 부며 쭈뼛쭈뼛 밖으로 나가야 했다.

 

앞서 나는 이 연극을 액자식 구성으로 재구성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그 구성에서는 외화와 내화의 구분이 불명확하다. 그리고 관객도 연극의 한 요소를 어정쩡하게 받아 안아버렸다. 세계 속에서 모든 개인이 그러하듯.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이 연극은 미완인 것이다. 아무것도 끝나지 못하였는데 모든 것을 극 중 긴장으로만 만들어 버리는 커튼콜은 그렇기에 섣부르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극은 관객에게 함부로 희망을 주거나 존재하는 갈등을 화해시키지 않는다. 진행되는 열전 앞에서 그것은 연극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각자의 노력을 각자의 수고를. 각자의 것들이 세계를 얼마나 추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음에도 변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러시아 붕괴.jpg

 

 

러시아라는 국가의 책임을 등에 지고 전면에 나선 것은 역설적으로 러시아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러시아 국적의 레즈비언 여성이다. 그녀는 앞서 2부 러시아의 무용 공연 배경으로 송출되던 인터뷰이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러시아의 침략에 책임감을 느끼고 마음 아파한다. 그녀의 친구들은 전쟁 반대를 외치다 사라지기도 한다. 이런 그녀는 모든 것을 잊겠다고 말한다. 그녀는 잊겠다 말하며 막춤을 춘다. 그것은 차라리 몸부림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그녀의 영상이 송출된 이후 무대에 있던 무용수들은 이전까지의 감독의 지시에 따르던 정제된 무용이 아닌 망가진 로봇처럼 뒤틀리고 삐걱거리는 춤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녀가 잊지 못할 것임을 안다. 잊지 못할 사람의 잊겠다라는 포효는 기억하겠다는 담담한 한 마디보다 솔직하다. 이제 감독은 없다. 잘 차려 입은 무용수들은 말도 안되는 춤을 추며 무대 바닥에 쓰러진다. 그들이 괴로워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달라질 수 있다는 확신으로 움직이는 것은 역사 속에서 다수에게 허락된 것임은 아니었음을 기억할 뿐이다.

 

*

 

추신: 나의 아늑한 화약고에게

 

여행 중 도미토리에서 자던 나는 꿈에서 전쟁을 겪었다. 으레 꿈이 그러하듯 나는 놀라지 않고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쩌면 꿈이어서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랫동안 그 순간을 준비해온 것처럼 기숙사 방에 있는 모든 빈 통에 수돗물을 채우고 옆방으로 달려가 친구들을 불러 함께 내 방 땅바닥에 둘러앉았다. 어딘가에서 들리는 경고방송에 의존하며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것은 가까운 이와 함께 하는 죽음이기도 간절한 삶이기도 했던 거 같다. 한국으로 돌아간다. 말도 안되는 일들 위에서 나는 언제나처럼 멀쩡하게 살아갈 것이다. 외면과 세계를 떠받치는 성실함은 병존한다. 그 병존의 가능성을 믿으며.

 

 

[진세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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