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유랑자들의 낙원, 노매드랜드 [영화]

글 입력 2024.02.14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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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 이름은 뭐라고 지었어?

- ‘선구자’

강인한 이름이네.

- 강인한 차예요.

 


노매드랜드(Nomadland). 말 그대로 유목민처럼 자유롭게 유랑하는 사람들의 땅. 펀은 가진 것 하나 없는 중년 여성이지만, ‘선구자’라고 이름 붙인 자신의 듬직한 밴과 함께 이 낯선 생활을 개척해나간다. 그녀는 집도 없이 밴을 타고 다니며 이곳저곳을 떠도는데, 자금 마련을 위해 물류창고 아르바이트를 하다 자신이 한때 가르쳤던 소녀를 마주하게 된다.


 

엄마 말로는 집이 없으시다던데 진짜예요?

- 아니, 집이 없는 건 아냐.

- 거주할 곳이 없는 거야.

- 집 없는 건 다르잖아.

 

 

 

거주와 실존에 대하여


 

집, 그리고 거주. 집은 무엇이고 거주라는 건 또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거주란 인간 실존의 근본적 출발점이고, 주택은 그 물리적 토대라고 보았다. 거주는 인간이 한 공간 속에 단순히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세계와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입각하여 본다면, 밴은 인간이 일반적으로 거주하는 ‘주택’으로 여기기엔 불안정한 기반이지만,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도록 이어주는 ‘연결고리’의 역할은 톡톡히 해낸다.

 

 

 

고무바퀴 유랑자 모임


 

펀은 남편과 사별한 뒤 오랜 시간 동안 은거하며 스스로를 고립시켰지만, RTR이라고 불리는 고무바퀴 유랑자 모임을 통해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부고로 혼자가 된 청년, 회사 동료의 돌연사로 삶에 회의감을 가지게 된 중년 여성, 폐암으로 인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노인까지. 그들은 RTR이라는 단체를 통해 이 곳에 모이며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서로의 아픔을 껴안아주는 특별한 사이가 되어간다.

 

 

우린 기꺼이 돈의 멍에에 속박되어 한평생을 살아가죠. 

열심히 죽어라 일만 하다가 벌판으로 쫓겨나는 가축, 우리가 그런 신세죠.

이 사회가 우릴 벌판으로 내쫓으면, 우린 함께 모여 서로를 돌봐줘야 합니다.

그게 RTR의 취지죠. 

지금 제 목표는 최대한 많은 구명보트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태우는 겁니다.

 


RTR의 창시자인 밥 웰스는 하얀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마치 산타클로스의 모습을 연상케하는 노인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고단한 인생에 지쳐 주저앉은 이들에게 ‘삶은 그 자체로 선물’임을 깨닫게 하는, 어른들을 위한 산타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행복이란


 

우리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학점을 받아 좋은 회사에 취직하며, 좋은 회사에서 높은 연봉을 받는 삶을 꿈꾼다. 이 모든 과정들은 수단-목적이라는 사슬로 끊임없이 연결된, 이 사회가 인정하는 단 하나의 경로이기 때문이다. RTR의 캠프파이어에서, 멀은 세상을 떠난 동료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퇴직 문제를 의논하고 열흘 뒤, 그가 죽었어요.

마당에 세워둔 새 요트를 한 번도 타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못 누려보고...

그가 죽기 전에 그러더군요.

‘시간 낭비하지마, 멀. 인생 짧아’

그래서 당장 퇴직했죠.

마당에 요트를 세워둔 채 죽긴 싫었거든요.

 


나는 처음에 이 대사를 듣고, 마당에 세워둔 요트를 당장 타러 떠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찾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 충동적인 선택은 오히려 현실에 대한 도피이며, ‘마당에 세워둔 요트’ 자체 행복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허상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노매드랜드6jpg.jpg

 

 

우리는 늘 ‘지금 이 순간’을 희생하면서 더 나은 내일, 더 나은 미래를 그려나간다. 이번 과제만 끝나면, 이번 시험만 끝나면, 이번 업무만 끝나면 그제서야 행복을 쟁취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진정한 행복이란 이벤트처럼 기다리고 기다리다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달려나가는 그 순간순간 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익숙함에 무뎌지지 않고, 내 일상을 이루는 사소한 모든 존재들에 감사할 줄 아는 것. 과정이 고통스러우면 결과에 집착하게 되지만, 마음에 작은 여유를 가지고 과정을 차근히 밟아 나가면 결과가 어떻든 그 시간 자체가 인생의 소중한 경험이 된다. 삶은 우리가 눈감는 바로 그 순간까지 지속되는, 연속된 스펙트럼 같은 것이니까.

 

 

 

구멍난 마음들


 

펀과 일행들은 암석지대를 구경하다, 특이한 생김새의 돌을 발견하곤 묻는다. 돌에 왜 구멍이 났느냐고.

 

 

한땐 이 속에 공기가 차 있었어요.

작은 가스 기포들이 갇혀있었죠.

그래서 잘 부서져요.

 

 

그 수많은 구멍이 나 있는 돌들이, 어쩌면 우리가 중년에 이르러 맞이하게 될 마음과도 닮아있지 않을까? 한때 사랑, 우정, 희망 그리고 질투로 차 있었을 치기 어린 감정들이 무수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며 만들어진 구멍 난 마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 웰스는 펀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그래도 괜찮다고, 있는 힘껏 아파해도 괜찮다고 말이다.


 

여기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난 그들에게 작별 인사는 안 해요.

늘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하죠.

그러면 1달 뒤든, 1년 뒤든 더 훗날이라도 꼭 만나죠.

난 믿어요, 머지 않아서 내 아들을 다시 만나리라는 걸.

 

 

자신의 존재 의의를 상실하고 불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현대사회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울림을 오롯이 느끼며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빛나는 현재를 살아갈 수 있기를, 우리의 일상에 자연스러운 행복이 깃들 수 있기를.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 속에서 시들고

우연히 혹은 자연의 변화로 빛을 잃지만

그대의 여름날은 시들지 않으리

그댄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리

죽음도 그대가 제 그늘 속을 헤맨다고 자랑 못 하리라

그댄 영원한 운율 속에 시간의 일부가 되리니

 

[김보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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