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소리가 닿는 방식 - 한수진과 브리티시 오리지널

소리가 닿는 방식
글 입력 2024.02.09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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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수진 바이올리니스트를 알게 된 건 유튜브 채널 ‘또모’에서 기획한 어느 영상에서였다. 한 어린 영재의 1:1 클래스를 맡은 한수진 바이올리니스트는 음악 자체에, 혹은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가에게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한수진 바이올리니스트의 한마디, 한마디에 따라 교정되고 달라지는 연주가 놀라웠는데, 이건 기교를 수정해서가 아니라 음악을 대하는 관점이나 태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일어나는 변화라는 점이 새로웠다.


음악에서 단순히 멜로디 이상을, 그 너머를 보게 했다는 것이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된 유일하며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후 그의 개인 유튜브 채널도 구독하며 생각날 때마다 보았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 연주한 막스 리히터의 ‘사계’편 영상은 반복해서 보았기에 귀에 익은 음악이었다. 영상 속의 그의 연주는 빠져들 수밖이 아름다웠기에 이번 공연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날 연주된 곡들 중에서 감정적으로는 에드워드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이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은 듯 하다. 엘가의 대표적인 관현악곡인 이 곡은 14개의 변주곡으로 되어있다고 하는데 이날은 제 8번, 9번 변주곡이 연주되었다. 곡을 듣고 나서 프로그램북을 펼쳐 곡 설명을 보았는데, "장중한 음악으로 숙연함을 자아내며 이 작품의 가장 감동적인 대목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부분에서 크게 공감했다. 문자가 없는, 시간 속에서 음의 높낮이로만 전개될 뿐인 음악이 분명히 무언가를 내게 안겨준다는 것이 조금 벅차게도 느껴졌다.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 음악이 표현하고자 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음악은 그렇게 감동적인 무언갈 주지만 내게 아무것도 내놓으라 하지 않았다. 그저 들려줄 뿐이며 미련이 없다는 듯 공중에서 사라진다.. 말과 글은 사람을 질리게 할 때가 종종 있고 요즘도 조금 그런 상태였는데, 그런 내 상태와 비교되어 음악을 듣는 시간 내내 계속 행복한 감정에 잠겨 있을 수 있었다.


한수진 바이올리니스트는 네 번째 곡인 본 윌리엄스의 ‘종달새의 비상’과 막스 리히터가 재구성한 ‘사계’에 협연했다. ‘종달새의 비상’에서는 특히 마라톤처럼 끊일 듯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연주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음악은 아주 강하고 아주 여린 연주의 진폭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강하게 연주되는 부분에서는 쉽게 빠져들었으며 들릴 듯 말 듯 약하게 이어지는 선율을 발견했을 때는 곧 사라지는 것 같은 음을 찾으며 좇아가게 만들었다. 음악은 그런 방식으로 나를 초대하고 있었다. ‘이끌었다’는 표현을 썼다가 지웠다. 확실히 음악은, 영화처럼 관객을 압도하며 끌고 가는 매체와는 다른 것 같다. 음악은 좀 더 편안한 이불이나 물결과 비슷하다.


공간적인 특성 때문이라고도 생각이 든다. 나의 좌석은 2층에 있었다. 뮤지컬이나 영화가 아니니까, 보는 것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공연장의 전체적인 규모가 위에서 내려다볼 때 더 잘 보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거기서 듣는 음악은, 음악 이전에 소리였다. 연주가 진행될수록 이 사실이 부각되어 느껴졌다. 멜로디의 흐름은 익숙했지만 소리가 나에게 닿는 방식은 영상으로 접할 때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공연장 소리는, 디지털 기기에서 영상을 재생할 때처럼 귀에 바로 꽂히는 방식이 아닌 공간에서 울려 퍼진 상태의 소리의 몸집이 나에게 무심코 닿는 방식이었다. 마치 어떤 소리는 제 몸체의 일부 중 몇 개가 떨어져 나간 상태로 날아서 온다는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전부를 잡진 않아도 괜찮은, 음악의 목적은 그런 것 같은.


완전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게 더 진짜 같았다. 모든 소리가 나에게 정확히 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오케스트라의 소리 전부는 커다란 공간을 메우고, 사람들은, 나는 그 안에 있다. 마치 어떤 바다의 물결처럼 어느 부분은 강하게 흘러왔다 불현듯 멀어지고 사라지고, 다시 나를 찾아오는 식이었다. 이렇듯 나와 오케스트라의 거리가 만들어낸 것 같은, 소리가 나에게 닿는 어떤 특정한 방식 때문에 음악을 들으며 음악에 관해 생각하는 동시에, 이 소리들의 목적이 무엇일까 생각이 갈라지기도 했다.


소리의 목적을 생각하니 연주자들의 마음을 상상하고 싶어졌다. 모두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 가만히 앉아 하나의 소리 뭉치를 만들어내는, 이름을 모르는 그들의 감정 같은 것을. 

 

현을 긋는 활이 모두 위를 향해 있었다. 소리가 울려 퍼지는 형상이 눈에 보인다면 위로 올라간다고 표현하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그런 근거로 내가 음악을 연주하면, 어딘가 이걸 바칠 것 같다. 애초에 가질 수 없는 소리에 욕심내지 않을 것 같다. 오직 연주하는 시간 안에서만 발견되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입장이라면, 그 시간에 나를 온전히 내던질 것 같다고. 연주자들은 관객에게 소리를 들려준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신을 생각할까.


마지막 곡 에릭 코츠의 ‘런던 모음곡’을 들으며 지금까지 알고 있던 전형적인 영국 이미지가 떠올랐다. 영국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매체에서 보였던 여러 이미지들이 종합되어 담긴,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친숙한 외국의 민요를 듣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브리티시 오리지널’이라는 이번 공연의 본분을 명확히 확인시켜주는, 즐거운 순간이었다.


영화나 책은 말을 한다면, 음악은 잠기게 한다. 이런 생각을 처음 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도, 혹은 마음이 없는 상태여도 지치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내게 온다. 그리고 이 생각이 피아노 독주곡이 아닌, 가사가 있는 노래가 아닌, 관현악 위주의 구성인 오케스트라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생각해본다. 바로 이런 방식의 음악이었기에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너무 오랜만에 보는 오케스트라 연주였다. 문자가 없고 말이 없다는 상태가 나를 이렇게 편안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지 알게 된, 너무나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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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진 바이올리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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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아드리엘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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