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가 빌려온 시간의 가치, 뮤지컬 렌트

525,600분을 오직 사랑으로 버틴다면
글 입력 2024.01.15 11:2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2023뮤지컬렌트] 포스터.jpg

 

 

여느 날 새벽처럼 그날도 인스타그램 릴스를 넘기고 있었다. 의미 없이 웃음을 흘리며 캄캄한 내 방의 반딧불이를 자처하고 있는데, 때마침 뮤지컬이 하나 나왔다. 사랑의 방식, 그러니까 동성애와 양성애 같은 단어들이 나왔고, 사랑의 행위, 다시 말하면 섹스와 관련된 이야기가 필터 없이 빠르게 던져지고 있었다.

 

댓글은 논쟁적이었다. 불온하다, 지저분하고 저급하다 등의 반응이 많았다. 해당 작품을 관람한 적 있는 소수의 사람만 겨우 몇 초 자극적으로 잘라낸 장면으로는 작품의 맥락을 판단할 수 없다며 열심히 변호했다. 나는 다른 영상을 보기 위해 무심히 화면을 넘겼다. 웃고 싶을 뿐, 싸움을 보려고 새벽을 지새우는 건 아니었으니까.

 

내게 <렌트>의 이미지는 그래서 겨우 그 몇 초였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특이한 작품, 성과 사랑은 이제 약간 올드한 주제이지 않은가 하는 감상을 주는 굳이 보지 않을 것 같은 뮤지컬. 그리고 일주일이 안 되어 나는 이 작품을 예매하게 된다. 몇 초가 만든 작은 호기심이 120분을 훌쩍 넘긴 거다.

 

 

[2023뮤지컬렌트] Seasons of Love.jpg

 

 

나는 뮤지컬을 잘 알지 못한다. 가격이 너무 비싸다 보니 선뜻 취미를 붙이기도 어려웠고, 괜찮은 공연은 다 서울에서나 열렸다. 그러니 이 유명한 작품의 관람 포인트는 무엇인지, 어떤 넘버가 대표곡이며 배우들이 얼마나 캐릭터를 잘 살리고 있는지 등등은 일절 알지 못한다.

 

결국 내겐 특혜가 하나 있는 거다. 바로 무지의 눈으로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는 특혜다. 가장 무심하니 어쩌면 가장 객관적이고, 또 최고로 감격에 차 볼 수 있는 시점. 감히 그 시야로 이 작품을 평가하자면, '뜨겁다'.


그래. 겨우 몇 초로 포착해 낸 작품의 단면은 열기를 지피기 위한 차가운 땔감이었던 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 있어야 해, 우리가 길을 잃고 방황하더라도 반드시 사랑으로 일어서야 해. 너무나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메시지가 배우들의 몸짓으로, 또 목소리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동성애, 양성애, 혹은 다자연애까지. 누군가에겐 논쟁적일 수 있지만 또 누군가에는 당연한 사람의 권리인 단어들은 결국 우리에겐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였다.

 

연인을 잃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두려워하는 로저와 아픈 몸일지라도 사랑을 시작하고 싶은 용감한 미미라는 두 주인공을 내세우면서 극은 단순히 젊은 청춘들의 로맨스를 그려내는가 싶다가도, 가난에 절었지만 영혼의 지시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는 젊은 청춘들이 삶의 풍파에 꿋꿋이 손을 맞잡고 버티는 모습을 보여주며 대체 인생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가족애든 이상을 향한 열정이든, 한 치 앞도 모를 두려운 1년은 사랑에 의지해 흘러간다.

 

 

[2023뮤지컬렌트] Today 4 U_엔젤(김호영).jpg

 

 

극 중 가장 눈에 띄었던 캐릭터는 단연 엔젤이다. 꿉꿉하고, 비참하고, 희망 없는 앞날에 조금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는 이들 앞에 사랑, 희망, 그리고 기쁨을 흩뿌리며 나타난다. 크리스마스 그 자체로 등장한 그는 정말 트리 아래 선물 같고, 천사처럼 빛난다.

 

엔젤은 모든 인물을 한데 모이게 만들기도, 또 뿔뿔이 흩어지게도 만든다. 그가 살아있을 때 모두는 웃었고, 그가 죽자 모두가 고난에 휘말린다. '사랑'의 힘 그 자체를 나타내면서 작품의 구심점이 되는 인물이다. 톡톡 튀고 가장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였던 만큼, 배우의 매력이 상당하다고 느꼈다.

 

가장 인상적인 연출 역시 엔젤의 죽음이다. 마치 성행위를 하는 듯 벅찬 신음이 터져 나오다가 그것이 곧 죽음을 앞둔 고통의 목소리가 되고, 빨간 조명과 함께 흰 천을 뒤집어쓰고 뒤돌아서는 그의 모습은 그간 본 중 가장 강렬하고 짧은 인생의 은유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마지막 몇 분도 떠오른다. 삶은 그토록 격동하며, 이해하기 어렵다.

 

모린 역시 빠트릴 수 없다. 극의 텐션을 단번에 끌어올리는 이 예술가는 무서울 정도의 무대 장악력을 보여준다. MBTI 검사로는 측정할 수 없는 극강의 E 캐릭터를 보고 있자니 I의 성향이 강한 나로서는 기가 다 빨렸다. 배우라는 직업에 존경심마저 들었다. 최고의 역량을 가진 이 아니고서야 이 캐릭터를 맡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캐릭터도 <렌트>가 아니고서야 마주할 수 없을 테다.

 

 

[2023뮤지컬렌트] Christmas Bells.jpg

 

 

청춘들의 꿈과 사랑을 노래하는 작품들은 모두 반짝반짝 빛이 난다. 도저히 포기하지 못하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이들이 보여주는 타오르는 욕망이 시시한 현실에 작은 불꽃들을 펑펑 터뜨려주기 때문이라.

 

<렌트>의 청춘들은 다른 극보다도 더 어려운 현실을 겪고 있다. 주류계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에이즈 환자이거나 동성애자이며, 가난하고, 예술가다. 하나도 힘든데 몇 가지가 중첩되어 있으니 도저히 미래라는 게 막연하기만 하지 희망차 보이지 않는다. 방황하고, 싸우고, 운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이 아직 거기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위태로운 불꽃처럼 꺼질 것 같았으나 금세 일어났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 이 작품의 메시지가 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또 무언갈 포기하게 되더라도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그리고 삶의 가치는 무엇도 아닌 사랑으로 잴 수 있으니, 우리는 무엇이든 사랑해야 한다.

 

낭만적이기만 하고 무게가 없는 말 같이 들리는가? 하지만 어쩌겠나. 사람의 인생엔 원래 무게가 없다. 죽으면 날아가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야기는 낭만이 실려야 재미있다.

 


[유다연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