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일상 위로 드리우는 상징의 그림자

도서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영화 <헝거 게임 : 판엠의 불꽃>(2012)
글 입력 2023.12.21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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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분열은 상징을 좋아한다(p.192). 팔레스타인 시인 무리드 바르구티의 수필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에 나오는 말이다. 제3차 중동 전쟁으로 인해 고향 팔레스타인 라말라에서 추방당한 시인은 오랜 시간 이방인의 생활을 한다. 이후 일시 귀국을 허락받아 30년 만에 고향을 방문하지만, 그의 고향은 이미 변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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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에 자리를 잃는 일상


 


어떤 종류의 점령이 됐든 점령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고향의 존재를 변형시키고 한 다발의 ‘상징들’로 바꾸어 버린다.

 

(p.100)

 


상징이 왜 문제인가 설명하기 위해서 대표적인 상징으로 비둘기를 가져와 봤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라고들 하지만, 실은 비둘기가 나타내는 것이 평화일 때보다, 그렇지 않을 때, 예를 들어 유해조류, 닭둘기, 그냥 새로 받아들여질 때가 더 평화로운 시대다. 우리가 평화를 되새긴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평화롭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는 전쟁에서만 평화의 상징이 필요하다.


상징이 된다는 것은 본디의 일상적인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점령 이후 그곳의 평범한 생활은 없어졌다.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곳을 떠올릴 때 아침을 먹으며 하루를 맞이하는 사람들, 일을 나가는 어른들, 골목을 뛰어다니거나 학교에 가는 어린아이들을 상상하지는 못할 것이다. 예루살렘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어떠한 상징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예루살렘은 신학의 도시 예루살렘이 되었다. 세계가 예루살렘의 ‘지위’, 예루살렘이라는 개념과 예루살렘의 신화에 관심을 쏟는다. 하지만 예루살렘 속의 우리네 삶과, 우리네 삶 속에 있는 예루살렘에는 관심이 없다. 예루살렘의 하늘은 영원하겠지만 그 안의 우리네 삶은 절멸될 위험에 처해 있다. (…) 점령당한 도시에서 가장 나쁜 것은 아마도 아이들이 즐겁게 놀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누가 예루살렘에서 재미있게 놀 수 있을까!

 

(p.192-193)

 

 

 

상징에 자리를 잃는 또 다른 일상, 개인



상징은 비단 무생물이나 동식물에만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 또한 상징이 된다. 


상징에 일상을 상실하듯, 영웅이 된다는 것은 개인의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에서도 일종의 영웅인 순교자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또한 등장한다. 순교자들은 떠났지만 그의 아들들은 남았다. 


순교가 말이 순교이지, 그를 아끼던 사람 입장에서 순교이든 개죽음이든 그게 무슨 상관일까. 그가 지금 내 곁에 없는데. 순교자의 가족이 자신을 그저 유가족이 아니라 ‘순교자의 가족’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따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뜻을 그 사람을 향한 내 사랑보다 존중해 주는 것. 진정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순교자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단단한 사람이 아닌가. 


개인을 잃은 영웅의 또 다른 예로, 영화 <헝거 게임> 시리즈가 있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가진 이 시리즈는 판엠이라는 독재국가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캣니스’는 본디 제일 가난한 동네의 소녀가장이었을 뿐이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개인의 삶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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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만약에’는 의미가 없다지만(심지어 창작물 속 가상의 역사도 역사다) 캣니스가 게임에 나가지 않았을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캣니스 없이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계속해서 굶주리고 핍박당하며 살았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삶을 사는 캣니스가 혁명에 성공한 캣니스보다 더 불행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혁명의 성공이 캣니스 개인의 행복에 기여했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일까.

 

 

 

일상을 되찾기 위한 상징



캣니스가 혁명의 상징이 된 계기는 시리즈의 제목 ‘헝거 게임’에 있다. 헝거 게임은 각 구역에서 선발된 젊은 청년들이 모여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서바이벌 경기이다. 누군가에게는 유흥거리이고 누군가에게는 스타가 될 기회이지만, 승자가 될 가능성이 없는 약자들에게는 그저 놀잇감으로 전락해 화려하게 목숨을 잃는 과정일 뿐이다.


캣니스는 추첨으로 선발된 어린 여동생을 대신해 그 놀잇감이 되는 데 자원했다. 사람들은 박수나 함성이 아닌 경례로 캣니스를 떠나보낸다. 검지, 중지, 약지만 펼친 채 들어 보이는 이 인사는, 장례식에서나 가끔 보이는 12구역의 오랜 관습으로, 감사와 존경, 그리고 안녕을 의미한다. 이 장면은 캣니스를 향한 사랑과 경외의 뜻이기도 하면서, 캣니스가 살아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희박한 가능성인지 알려준다.


하지만 그 희박한 꿈이 점차 선명해지며 이 손동작의 의미도 변한다. 헝거게임에 참여한 캣니스는, 적이어야 했으나 동료가 된 어린 소녀의 마지막을 기리기 위해 이 손동작을 한다. 방송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간 그 모습은 독재 아래 억압당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그렇게 이 작은 손짓은 혁명의 불씨가 되고, 작별과 애도의 손동작은 저항과 혁명의 상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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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헝거게임>의 손동작이 현실로 나타났다. 태국의 반정부 시위에서, 그리고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에서 사용되고 있다. 감사, 존경, 안녕을 뜻하던 가상 세계의 손동작이 이제는 선거와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를 뜻하는 현실 세계의 상징이 되었다. 


일상을 앗아가는, 위험한 존재인 상징을 우리가 이토록 애용하는 이유는, 일상이라고 할만한 것이 이미 없는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일상을 지킬 가치가 없다고 판단할 때는 잃을 게 없으니 상징을 선택한다. 그럴 때 상징은 일상의 자리를 꿰차고 그렇게 확보된 공간을 희망에 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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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하는 상징



물론 예루살렘과 <헝거게임>의 손동작에는 차이가 있다. 상징화의 주체가 다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의 상징화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점령 아래 강제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캣니스와 12구역의 손동작은 자신의 필요로 자신의 것을 상징화한 결과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서 역할 한다는 것이 평화롭지 않음을 증명하지만, 적어도 평화도 없고 평화의 상징조차 없는 것보다는 낫다. 상징화를 피할 수 없다면 상징을 경계하되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성소수자를 뜻하는 단어 퀴어(Queer)는 원래 기묘하고 괴상하다는 뜻으로 비하 단어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그들을 당당히 드러내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 퀴어만큼 정착한 것은 아니지만 여성 인권 시위나 여성이 주체가 되는 각종 콘텐츠에서 마녀를 긍정적인 의미로 활용하는 것 또한 비슷한 사례로 보인다.

 

 

점령은 우리를 낡은 틀 속에 가두어 버렸다. 점령이 우리에게 저지른 범죄는 바로 그것이다. 점령은 우리에게서 어제라는 가마를 빼앗았을뿐더러 내일을 빚어내는 신비로움마저 박탈해 갔다. (…)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이곳을 보았을 때, 나는 마치 주인이 잃어버린 개나 장난감 강아지처럼 이 마을을 멀리 걷어차 더 나은 미래, 다가올 날들을 향해 내몰고 싶었다. “달려가!”

 

(p.100-101)

 

 

이미 한 번 상징화된 공간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감히 말한다. 하지만 또 다른 상징으로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려면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에 집중해야 한다. 이 존재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지를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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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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