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요정으로 향하는 관문 - 로렌 차일드, 요정처럼 생각하기

글 입력 2023.11.2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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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흥미로운 감상을 들었다. 어렵고 불친절한 스토리에 이해하기를 포기하거나 어떻게든 의미를 발견해내려고 애쓰는 어른들, 그 너머 어린 관객들의 이야기였다.


“으악,” “우웩,” “우와아아.” 기괴한 왜가리, 타오르는 불, 범람하는 앵무새 떼 등의 시각적 요소에 어린 관객은 반사적으로 반응했다고 한다. 비슷한 듯 다른 결의 감정을 품은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감탄사.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본질에 가까운 관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샌가 잊어버린 순정의 빈 공간을 감각했다.


<로렌 차일드, 요정처럼 생각하기>에 관한 관심은 이로부터 비롯됐다. 요정이란 무엇인가. 영험하면서도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는 존재. 다양한 진리를 깨달았음에도 무엇보다 동심을 수호하는 신비로운 존재가 아닌가. 시간을 되돌려 맑은 육체를 가질 수 없다면, 적어도 요정의 시선을 갖고 싶었다. 앎과 지혜 속에서 순진함을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그토록 염원하던 마법이었으니까.

 

작은 소망을 밝히며, 요정으로 향하는 관문을 넘었다.

 

 


SECTION 1: 로렌 차일드와 상상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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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삽화가 펼쳐졌다. 그중 하나에 눈길이 멈췄다.

 

‘What planet are you from?_너는 어떤 행성에서 왔어?’


나만의 세계를 아는 것, 동시에 완전히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것. 각자가 그리는 세상을 존중하는 따스한 질문이었다. 요정의 첫 조건은 관용의 눈을 갖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잔디 위 거위 떼, 엉덩이에서 자라난 공작 꼬리, 바다 속의 슈퍼마켓. 상상 세계와 실제 세계가 교차하는 첫 번째 섹션에 머무르다 문득 생각했다. 이 공간의 주체가 어린이가 아닌 어른이었다면 ‘상상’대신 ‘정신착란’이란 이름이 붙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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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대상을 상상과 정신병으로 구분하는 정체모를 경계는 언제, 어디에, 왜 그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사실 저마다가 그려내는 우주 속에서 유영하는 존재일 텐데. 여러 우주의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비좁은 교집합이 지구라는 행성이 아닐까. 어쩌면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엄청난 우연이 아닐까.

 

 

 

SECTION 2: 고얀이와 강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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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세계의 경계를 인식하며 도착한 두 번째 섹션에선 어린이와 어른의 경계가 더욱 불분명해졌다. 고양이가 되어서라도 누군가의 애완동물이 되고 싶은 생쥐와 다른 강아지처럼 흙탕물에 뒹굴며 놀고 싶은 반려 푸들이 이곳의 주인공이다.


선망하는 타자와 그렇지 못한 자신, 선망받는 자신과 그렇지 못한 타자. 서로의 이상향에 있지만 어떤 위치에 있어도 실존적인 불안을 느끼는 두 존재. 매 순간 흔들리는 어른의 초상을 닮았다.


나와 타자의 세계는 다르면서도 필연적으로 겹쳐지고, 비좁은 교차로 속에서 삶의 대부분을 이어가야만 한다. 그 미묘한 경계에선 매 순간 선택이 이뤄진다. 나와 타자라는 극단 사이에서 자신을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지에 관한 저울질. 우리는 때론 나 자신이 되고 싶기도, 선망하는 타자가 되고 싶기도 하다. 무엇 하나, 고정된 건 없다.

 

 


SECTION 3: 책 속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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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섹션에선 세계의 충돌이 적극적으로 이뤄진다.

 

라푼젤, 빨간 모자, 헨젤과 그레텔 등의 개별적인 동화가 하나로 녹아드는 삽화는 단적으로 교차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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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개연성 없어 보이는 충돌 속에서 피어나는 이야기의 확장성은 흥미롭다. 누군가를 잡아먹는 선택지밖에 없었던 <빨간 모자> 속 늑대는 또 다른 이야기에선 요정 옷을 좋아하는 수줍은 늑대가 될 수 있다. 멋쩍지만 거울 속 새로운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는 늑대는 괴물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뒤엉키는 이야기란 결국 우리를 지키는 마법이 아닐까. 나를 나에게서, 너를 너에게서 해방하는 일.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될 수 있는 일. 나의 또 다른 가능성의 열쇠는 너에게 쥐어졌다는 일. 어지러운 교환 속에서 어느새 나와 너는 연결되는 동시에 공고히 고유해진다.

 

이토록 신비로운 일이라니. 충돌이란 논센스가 아닌 페어리 테일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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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다섯 번째 섹션을 찬찬히 따라가니 어느새 출구가 보였다. 동화에서 잔혹동화로 이어지는 연결통로 같았다. 문을 벗어나면 비로소 요정의 눈을 갖게 될지, 다시 잃어버리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문 너머에서도 환상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만 커질 뿐이었다. 망각을 피하기 위해 전시장에 무엇이 가득했었는지를 떠올렸다.

 

너그러움과 어우러짐.

 

요정이 된다는 건 나의 상상에서 너의 상상으로 넘어간다는 의미였을까. 부지런히 그런 마법을 실천한다는 것이었을까. 확신할 순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 모두는 여전히 요정이 될 수 있다. 동화 속에서도, 잔혹동화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밝히며, 바깥으로 향하는 관문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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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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