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우린 왜 서브병에 걸리는 걸까

도서 <서사의 위기>로 서브병 탐구하기
글 입력 2023.10.26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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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라 함은 남녀 사이의 사랑 이야기, 또는 연애 사건. 그러니까 ‘남주’와 ‘여주’, 즉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담긴 게 로맨스다. 남주와 여주는 한 명뿐이지만, 더 흥미진진한 전개를 위해 팽팽한 삼각관계를 만들어 주는 ‘서브남’을 곁들이기도 한다.

 

 

 

서브남



서브남이란 남주가 아니지만 여주와 로맨틱한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을 지닌 남자 캐릭터로, 주로 남주에게 위기감을 주어 남주와 여주 사이를 더욱 끈끈하게 만드는 희생양이자 촉발제 역할을 한다. 남주와 반대되는 캐릭터성을 가지는 것이 특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도 저도 아닌 캐릭터여서는 안 된다. 그래, 남주와 반대되는 캐릭터성이 아니라 반대되는 ‘매력’을 가진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그래야 소비자가 여주의 입장에서 서브남과 남주를 저울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울질이라고는 해도, 이 양팔 저울은 한쪽으로 매우 치우쳐 있다. 후더닛 추리물이 떠오를 정도로 이야기의 끝 무렵까지 누가 남주인지 헷갈리게 하는 콘텐츠도 종종 보이기는 하지만(대표적으로 응답하라 시리즈가 있다), 대체로는 누가 진짜 남주인지 아는 것이 어렵지 않다. 포스터에 등장하는 인물도 애초에 정해져 있고, 극이 이어질수록 어떤 캐릭터가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지 절대적인 분량의 차이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인기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에는 캐스팅 발표가 나니 더욱이 그렇다. 


즉 소비자는 누가 사랑을 쟁취하는지, 그러니까 이 사랑이라는 전쟁에서의 승자가 누구인지 관찰자로서 전장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알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상황에서 서브남을 응원하는 것은 마치 패배가 예견된 전쟁에 군사를 지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사실 그것보다 더 쓸모없는 짓일지도 모르겠다. 군사를 지원하는 것은 전쟁의 결과에 아주 약간의 변화라도 불러올 수 있겠지만 그냥 소비자가 서브남을 응원하는 것은 그 정도의 효과도 나지 않는다. 

 

 

 

서브병, 취향의 차이?


  

이렇게 무용한 짓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실은 그런 사람이 정말 많고, 이를 ‘서브병’이라고 칭한다. 남주보다 서브남을 더 좋아하고 응원하는 질병으로, 남주의 모든 행동을 아니꼽게 보기, 또는 서브남에게 나한테 오면 잘해줄게 라고 염불 외기 등의 증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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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서브병에 의문을 가졌을 때는 그저 취향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전통적인 로맨스물에는 전형적인 남주와 전형적인 서브남이 정해져 있다. 까칠하고 재수 없지만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할 줄 아는 남주, 그리고 한없이 부드러우며 상냥한 서브남. 그래서 후자의 캐릭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냥 그런 사람이 취향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로맨스물에도 변화가 찾아왔고, 더 이상 남주와 서브남이 그런 전형적인 틀에 갇혀 있지도 않다. 아예 반대로 상냥한 남주와 까칠한 서브남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서브병 환자들은 여전히 서브남의 손을 들어준다. 취향의 차이로 일축하기에 이 서브병이란 질환은 꽤 복잡하다.


 


안쓰러움에서 시작하는 애정?



서브병을 설명하는 이론은 주로, 서브남의 사랑이 실패할 것임을 소비자가 이미 알기 때문에 마음이 더 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서브남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현실에서라면 무엇 하나 꿀릴 것 없는 잘난 사람이 이 창작물 속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는 이유로 실연의 아픔을 겪는다. 그러니 소비자는 동정에 가까울 정도로 큰 안쓰러움을 갖게 된다. 이 안쓰러움이 무럭무럭 자라서 서브병을 유발한다. 


이 설명도 어느 정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스포츠 경기를 볼 때도 따로 응원하는 팀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냥 안타깝다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약한 선수나 약한 팀을 응원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서브병 또한 비슷한 현상으로 볼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이 설명만으로는 의문이 충분히 해소되지 않는다. 서브병의 주요 증상 중 하나로 여주의 판단을 의심하고 그의 선택을 원망하는 현상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실패한 서브남에게 마음을 쓰는 정도를 넘어서, 서브남이 아니라 남주를 선택한 여주를 이해할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경우 말이다. 안쓰러운 마음이 이성적인 판단을 흐렸다는 말만으로 이 증상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안쓰러움이 서브병을 유발하는 주요 요인이라고 말하려면, 서브병 환자들이 남주에게는 안쓰러움을 갖지 않는 이유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남주라고 해서 순탄한 길만 걷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또한 여러 장애물을 만나고 심지어는 주인공인 만큼 더 많이 고생하기도 하는데 왜 남주는 서브남만큼 안쓰럽게 여기지 않는가. 


물론 남주는 여주와의 사랑이라는 결실을 봄으로써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품의 분량, 감정 묘사, 연출 등 모든 부분이 주인공을 조명하며 서브남이 아닌 남주에게 공감하고 이입하도록 유도할 텐데, 이 섬세한 유도를 따르지 않는 이탈자가 이토록 많이 발생하는 것은 수상하다. 이탈자들을 선동하는, 서브남만의 특징은 무엇일까?

 

 

 

상상의 여지



긴 탐구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주인공 커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부작용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어떤 콘텐츠이든 분량은 한정되어 있고 그중 대부분은 당연히 주인공 커플로 채워진다. 주인공이란 원래 그렇다, 이야기의 상당수를 차지하며 소비자가 가장 가깝게 느낄 존재. 자연스레 주변 캐릭터들은 평면적으로 만들어지고 등장 비중도 매우 적다. 입체적으로 다듬을 만큼 분량을 투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브남이 있다. 서브남은 조연보다 입체적이되 주인공만큼 많은 분량을 가질 수는 없다. 적은 분량만으로도 입체적인 인물을 설정하고 여주와 가까울 이유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가장 쉽게 하는 선택이 바로 사연을 주는 것이다. 남주의 마음이 커지는 과정은 매분 매초를 공유한다 싶을 정도로 꼼꼼히 보여주지만, 서브남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큼직큼직한 사건만 드러나고 그밖의 것은 소비자가 직접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이 상상이 중요한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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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저서 <서사의 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보는 인식의 순간 이후 더는 살아 있지 못한다. “정보는 그것이 새로운 동안에만 가치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만 살아 있다. 오로지 순간의 시점에 사로잡히며 정보 그 자체에 대해 설명할 시간은 없다.” (…) 이야기하기의 예술은 정보를 내주지 않는 것이다. (…) 내주지 않는 정보, 즉 빠져 있는 설명이 서사적 긴장을 고조시킨다.

 

(p.14-15)

 


저자는 서사와 정보를 구분한다. 정보는 순간을 설명할 뿐이라 그 자체로 끝나고 더 이상의 확장 가능성이 없다. 하지만 서사는 맥락을 품고 있어 그 전후로 살을 덧붙일 수 있다. 확장의 가능성, 즉 상상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남주가 가진 것이 정보라면 서브남이 가진 것은 서사다.


작품은 남주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고 그 덕에 소비자는 작품을 보는 내내 남주의 행동에 설레며 울고 웃는다. 그러나 그렇게 한 번 자극을 제공한 후, 남주는 소비자의 머릿속에서 곧장 자리를 비워야 한다. 이미 작품 내에서 정보를 다 주었기 때문에 남주라는 페이지는 빈칸 없이 꽉 차 있고, 소비자는 답이 다 나와 있는 부분에 관해서 굳이 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실패해도, 죽지 않는 캐릭터



그러나 서브남에 관한 정보는 상대적으로 적고, 이 정보의 부족이 주는 낯섦은 우리가 서브남을 궁금해하도록 이끈다. 소비자는 주어진 몇 가지 단서를 바탕으로, 그리고 우리가 현실 혹은 다른 로맨스물을 통해 축적한 지식을 뒤져가며 이 캐릭터의 이야기를 채워나간다. 남주가 이미 작품 안에서 완성된 것이라면, 서브남의 캐릭터와 사랑은 소비자의 상상력으로 완성된다. 그러니 서브남에게 더 정을 붙이고 서브남의 사랑을 더 높이 평가하는 서브병이 발생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서사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날것의 사실 또는 숫자보다 효과가 좋다. 감정은 무엇보다 서사에 반응한다. (…) 감정은 이성을 거치지 않고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p.134)

 


사람이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잊혔을 때라는, 모 만화의 명대사가 있다. 이 대사는 사람 대상으로도 맞는 말이지만, 그보다도 창작물 속 캐릭터에게 적용될 때 더욱 확연히 느껴진다고 생각한다. 서브남은 여주와의 사랑을 얻는 데는 실패했지만 캐릭터로서 살아남는 데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서브병 환자들에게 조금의 위안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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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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