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방주에 타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 은하백만년의전쟁사

글 입력 2023.10.2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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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까.

 

이 질문과 관련된 연극 <은하백만년의전쟁사>가 시온 소극장에서 열렸다. 연극은 마치 '회전목마' 같았다. 철저한 구조주의적 기법으로 표현한 '살기 위해 죽여야만 하는' 역사를 지면으로 옮겨 본다.


<은하백만년의전쟁사>은 SF 대체 역사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끊임없는 진화를 거듭하여 인류가 멸절될 위기에 처한 근미래를 다룬다. 비감염자들보다 감염자들이 더 많은 세상이지만 감염자들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팽배하다.


이러한 사회적 감정을 누구보다 장려하는 것은 다름아닌 국가다. 급기야 '보건 파시즘'을 내세운 독재자가 나타나기에 이른다. 이에 감염자들은 코로나19에 감염된 사람들도 이민을 허락한다는 적도의 어딘가로 밀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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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눈치챘겠지만, 이는 성경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구조주의적으로 해석한 뒤 재구성한것이다.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노아의 홍수'의 서사 구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타락한 인간들을 보다 못한 신은 인간계에 큰 홍수를 내려 인간들을 벌하고자 한다. 그 소식을 미리 점지받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커다란 배를 만들어 소수의 선택받은 동물들과 함께 홍수 속에서 살아남는다. 인류를 멸망시키는 큰 홍수가 일어난다. 이후 마침내 비가 멎고 노아는 적도 근처에 위치한 희망봉에 정착하게 된다.

 


이는 다른 문화권의 홍수 신화와도 비슷한 궤를 보인다. 이 오래되고 보편적인 구조가 그대로 반복되어 여러 이야기로 전해진다는 것이 구조주의의 골자다.


떠올려보면, 성경보다 오래 전 쓰여진 <길가메시 서사시>도 비교적 최근 개봉한 애니메이션 <겨울왕국>도 비슷한 구조로 진행된다. 약간의 비약은 있지만, 이미지적으로 돌고 돌게 되는 것이다. 내용과 많이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은하백만년의전쟁사>는 그런 의미에서 설득력을 가진다.


이렇듯 큰 서사의 줄기는 성경 속 노아의 방주를 다룬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오히려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야훼를 모든 죄를 품어주는 인자한 아버지로 표현하지만 막상 그렇지만도 않다. 이 유일신은 때때로는 아주 폭력적이고, 인간은 그 절대적인 권력 앞에서 무기력하다. 떠올려 보면 선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인류를 말살한 이도 그였으며, 무고한 욥을 시험에 들게 하여 모든 것을 앗아간 이도 그였다.


<은하백만년의전쟁사>는 이러한 성경 속 신의 독재자적 면모를 인류 역사의 곳곳에 투영시킨다. 마녀사냥을, 십자군 전쟁을 더나아가서는 세계대전과 코로나 팬데믹을 차례로 조명한다. 모두 전체에 의한 개인이 희생된 사례이다.


이릉 표현하는 과정에서 연출과 세트도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연극에서 무대의 중앙에는 대형 회전목마가 설치된다. 회전목마의 중앙에는 다시 거대한 파라솔이 설치되고, 회전 목마의 한쪽 면에는 다시 굴뚝 모양의 탑승구가 있다. 관객들에게 이 탑승구는 하나의 프레임으로 보여진다.


그에 따라 회전목마가 어떤 방향으로 돌아가느냐에 따라서 인물이 굴뚝 속으로 들어가고, 그 굴뚝에서 큰 연기가 피어오르는 꼴이 된다. 이는 아우슈비츠나 핵전쟁을 연상시킨다. 무대에서만 볼 수 있는 연극의 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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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감상은 연극의 주인공을 떠올리면 더욱 강해진다. 연극에서는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철학적인 시를 쓰며 힘든 순간에도 철학적인 시를 쓰며 기다린 '당신'과 보건 파시즘을 지지하는 당을 선전하던 여자인'너'. 이 둘은 각각 철학자 '니체'와 성경 속 인류 최초의 살인마인 '카인'을 상징한다. 그리고 둘은 반 성경적 인물의 대표격이다.


이들은 겨우 몇 시간을 주기로 백신을 주사한다. 백신을 맞으면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과 환각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맞지 않으면 목숨을 잃게 되므로 어찌할 방도가 없다.


서로를 경계하며 거리를 좁히지 못하던 이들은 점차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는 서로에게 백신을 주사해 주기도 한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항구에는 배가 도착한다. 둘은 적도의 어느 나라에서 행복해질 꿈을 꾸며 춤을 추지만, 적도로 가지 않고 서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로 삶을 마친다.


이들의 선택은 다소 여운을 준다. 이들은 왜 유토피아 행을 포기하고, 죽음을 택한 것일까. 끝까지 방주를 기다리고, 적도에 도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앞서 언급한 다른 홍수신화들을 토대로 예측해 보겠다. 둘은 선택받은 사람들이 되어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성경에서 노아와 식구들이 무지개를 보았듯이, <겨울왕국 2>에서 아렌델의 사람들은 새로운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안나는 국왕이엘사는 신이 되었듯 말이다.


이러한 결말은 행복하지만 결국 체제에 굴복하고 세상 속 문제를 회피한 것이다.


그러나 <은하백만년의전쟁사> 속 ‘너’와 ‘당신’은 그 거대한 흐름에 맞선다. 사람 인을 그리며 신이 되는 대신 불완전한 인간으로 남길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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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머리가 복잡했다. 요즘의 삶은 그동안 내가 알던 삶과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들은 여유가 없었다. 출근길에서 누가봐도 아픈 사람이 식은 땀을 흘리고 있어도 누구도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천정부지로 높은 월세와 식료품 값에 장을 보러가도 살 것이 없었다. 매일매일 출근해서 수많은 사람들과 메일로 메신저로 연락했지만 실제로 발화한 날은 손에 꼽았다. 서점에 가도 새로운 시집이나 잡지는 찾을 수 없었다. 아마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넷 세상에도 여유는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탓하기 바빴다. 사람들은 꽤 자주 벌레가 되었으며, 누군가 부당한 일을 당할 때에도 '누칼협'을 외친다. 그에 따라 아기 울음 소리가 사라지고, 학생이 사라지고, 선생이 사라졌다.

 

<은하백만년의전쟁사>는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시사점을 준다.

 

 

[신동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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