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당신의 빛

윤이 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글 입력 2023.10.17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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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 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윤'은 "반질반질하고 매끄러운 기운"을 의미한다고 한다. 특히 태도, 말투, 눈빛에서 단정하고도 자신들만의 강력한 힘이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윤이 묻어나온다. 반짝반짝한 자신들만의 고유한 빛들이 에너지처럼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데, 이 글에는 윤이 나는 어떤 두 명의 이야기를 빌려와 전하고자 한다.

우선 마이아 에켈뢰브이다. 몇 년 전 발간된 책,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는 여성 청소노동자로 살았던 마이아 에켈뢰브의 일기를 모은 것이다. 1918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마이아는 홀로 5남매를 키워냈고, 청소 노동을 하며 야간학교 강의를 들었다. 책을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고, 솔직한 글쓰기를 계속했으며 국내외 정치, 사회 이슈에도 지적 관심이 많았다. 아래는 마이아의 일기 중 일부이다.
 
 
내가 바꾸고 싶은 것
“만일 사람마다 삶을 살아갈 힘이 있어야 한다면 자기를 위해 길을 밝혀줄 불빛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내 빛은 오랫동안 작가 하리 마틴손이었다. 마틴손은 굴욕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 굴욕을 이겨낼 것이다... 마틴손은 저 밖에 서서 부자들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 역시 밖에서 그 일을 해낼 것이다 마틴손은 무기력해지지 않고 가장 비천한 일을 해 냈다. 따라서 나 역시 청소용 양동이에 익사하지 않고 내가 맡은 청소부 일을 해낼 것이다." - 마이아 에켈뢰브,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어느 여성 청소노동자의 일기)』, 교유서가, 2022, p. 18

1968년 2월 24일
"베트남이 불타는 동안 나는 쉰 살이 되었다." - 마이아 에켈뢰브,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어느 여성 청소노동자의 일기)』, 교유서가, 2022, p. 140

1966년 가을 학기
"나는 계속 일기를 쓴다. 내 삶이 다른 누군가의 관심을 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가끔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다면 삶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 마이아 에켈뢰브,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어느 여성 청소노동자의 일기)』, 교유서가, 2022, p. 54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들에게 벌어지는 일까지도 진심을 담아 걱정하는 그녀의 따스함에, 아이들을 키워내는 고독한 피곤 속에서도 배움을 계속한 그 순수한 열정에, 글을 읽으면서 저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이렇게 마이아는 바쁘다는 이유로 시간에 쫓기기보다,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삶을 끊임없이 기록하며 배웠다. 삶이 단지 피곤하다는 이유로,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사회 내 ‘청소노동부’라는 직업에 자신의 가치까지 한계 지어버리지 않은 것이다.

책을 읽으며, 우연히 몇 년 전 방영된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여전히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오광봉’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2014년 SBS의 '세상에 이런일이' 프로그램에 따르면, 그는 부산 감천동 문화마을에서 35년 동안 많은 신문 배달을 했다. 수많은 부수를 전하면서도, ‘노는 것이 힘들지 일하는 것은 즐거워요’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아이 같은 해맑음이 서려 있어, 쉬이 잊히지 않는다.
 
빼곡히 책과 그의 세계로 가득 찬 방과, 책 구매에 결코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말 그대로 빛이 묻어나는 듯했다. “좋은 책을 읽으면 절대 나쁜 생각을 할 수 없다.”라고 하신 것처럼, 그의 정신은 결코 가난해진 적이 없다는걸, 긴말 없이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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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말씀처럼 현재 우리는 정신이 가난한 세대를 살고 있다. 가진 것을 보여주기에 급급한 욕망, 그 욕망 사이로 소외되는 감정을 겪으며 현실의 절망감은 때때로 찾아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해지지 않은 나의 정신과 세계를 지켜나가는 일, 나의 가능성을 내가 가장 믿어주는 일이 얼마나 귀한지를 느끼게 된다. 씨네21 김혜리 기자는 위 일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문의 글을 쓰지 않다 보면 어느 새벽, 당신은 읽는 이가 기다린 대로 긴 글을 쓸 수 없게 됐음을 깨닫게 된다. 아무도 먹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리하지 않다 보면 혼자만의 식사도 거칠어진다. 당신의 우주는 그런 식으로 비좁아져 간다.”
 
- 씨네21 김혜리 기자
 

점점 코끝이 시려오는 겨울이 다가온다. 이런 날들 사이, 월요일은 여전히 싫어지더라도, 가끔 피곤함에 찌든 퀭한 눈빛이어도, 큰 길잡이는 잃지 말자고 몇 번이고 적어본다. 나의 우주가 적어도 좁아지지는 않기 위해, 정신만큼은 풍요롭게 하려고 말이다. 또 그렇게 고민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일상의 당연한 것들에 감사하며, 오늘의 일을 쓰고, 누군가의 글을 읽으면서 윤이 나는 사람으로 존재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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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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