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돌봄의 중요성과 살핌의 필요성

연극 《Let the Bodies Pile》
글 입력 2023.10.12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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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는 매년 8월, 도시 전역에 걸쳐 큰 페스티벌이 열린다. 거리 곳곳에서 종류 불문의 공연이 열리고 수많은 인파가 몰린다.


나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로 8월 영국 여행 일정에 스코틀랜드의 수도를 대충 끼워놓았는데, 에든버러행 바로 전날에야 페스티벌 소식을 우연히 전해 들었다. 어쩐지 런던보다 에든버러의 숙소 값이 두 배 정도 비싸더라니.


페스티벌에 관해 아는 것은 없지만 국제적인 행사의 현장에 있는 만큼 하루쯤은 페스티벌에 온전히 투자하기로 했고, 그렇게 본 공연 중 하나가 연극 《Let the Bodies Pile》이다.

 

 

 

Let the Bodies Pile



1993년, 조지는 자신의 병든 노모가 담당 의사에 의해 안락사를 당했으며, 주 보호자이던 오빠(혹은 남동생) 프레드가 그 사실을 묵인했음을 알게 된다. 스티브는 그 사실을 알고 분노해 담당 의사를 찾아가지만, 담당 의사는 이 일을 덮기 위해 조지도 죽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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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7년 후, 지난 일의 죄책감으로 충격에 빠진 프레드는, 눈만 떴을 뿐 거의 식물인간 상태로 지낸다. 사람들은 프레드가 제정신이 아니거나 제정신이어도 제대로 반응할 수 없는 상태라고 생각하고, 프레드가 있는 병원의 돌봄사, 저스틴도 그중 한 명이다. 농땡이 칠 기회만 엿보는 게으른 돌봄사 저스틴에게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프레드의 병실은 은신처로 안성맞춤이다. 그는 자주 프레드의 병실에 숨어들어 반응 없는 프레드에게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다.


불성실하긴 하지만 그저 그뿐,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던 저스틴. 그러나 코로나 사태가 벌어지며 상황이 바뀐다.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결국 저스틴의 회피와 방관으로 환자가 사망하고, 저스틴은 의식이 없는 줄 알았던 프레드가 자신이 한 짓을 모두 알고 있으며 몸도 움직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프레드는 저스틴이 환자를 돌보고 살릴 의무를 다하지 않았음을 신고할지도 모른다.

 


 

돌보는 사람



저스틴의 잘못, 그러니까 불성실함은 어디서 오는가 생각해 봤을 때, 근본적인 요인은 제 일의 중요성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고 느껴진다. 제 역할의 가치를 안다면 그것을 제대로 하지 않을 리가 없다. 


아이가 돌봐지고, 노인이 돌봐지고, 환자가 돌봐진다. 약자는 돌봐지는 사람, 강자는 돌보는 사람. 하지만 그렇게 단언하기에, 돌보는 사람을 강자라고 하기에 돌보는 직업은 너무나 평가 절하 받는다. 당연하게 가정을 돌봐왔던 여성들을 향한 시선이 그래왔고 현대에 와서는 가사 노동자, 간병인들을 향한 시선도 그렇다. 저스틴은 본인이 그 직업을 가지면서도 제 가치를 모른다. 


인문 잡지 한편의 6권, <권위>에서 의료인류학자 서보경은 살리는 일의 권위를 이야기한다. ‘돌보는 일은 고도의 숙련과 심층의 지식을 요하는 일(p.74)’인데 ‘돌봄은 왜 삶과 죽음을 가르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서도 헐값의 하찮은 일이 되어야 하는가(p.75)’ 하는 의문을 던진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돌봄은 기울어진 자세에서 이루어진다. ‘무릎을 굽히고, 등을 구부리고, 팔을 뻗고, 몸과 마음을, 눈과 귀를 기울이는 순간이 돌보는 일에는 늘 필요하다(p.70)’. 이 점이 문제 발생 지점이다. 우리는 수직적이고 뻣뻣한 전통적 권위에 너무 익숙해서 돌봄이 권위인 줄 모른다. 

 

 


A carer who doesn’t care



당연히 연극은 영어로 진행됐다. 저스틴의 직업을 표현하기 위해 쓰인 단어는 Carer. 간병인, 혹은 보호사라는 단어가 더 흔히 쓰이지만 굳이 돌봄사라는 말로 옮겨 적은 이유는 ‘돌봄(care)’이라는 단어에 집중하고 싶기 때문이다.


저스틴은 스스로 말한다. 자신은 돌보지 않는다고(I don’t care). 그러나 그는 돌봄사(a carer)이다. 프레드는 돌봄사이면서 돌보지 않는 저스틴을 비판한다. 돌보지 않는 것은 저스틴만이 아니다. 우리도 돌보지 않는다. 우리는 돌봄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A carer(살피는 사람), not a carer(돌보는 사람)



인권 운동이 일어나고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돌봄의 전문성과 권위가 돋보이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필요하고 나 또한 이 변화를 환영하지만, 이는 돌봄의 역할을 특정 직업인에게만 미루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도 있다. 


분업화로 인한 인간 소외. 이는 한 팀, 한 회사 안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라 더 큰 공동체에서도 발생한다고 본다. 어떠한 일의 전문가가 생기는 것은 그 전문성, 가치, 권위를 인정받는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외의 사람들은 그 일을 하지 않으려 들 수도 있다는 뜻이다.


돌봄사(a carer)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돌보는 사람(a carer)이다.


그래서 돌봄과 살핌을 구분하자고 말하고 싶다. 비슷한 말이지만 돌봄보다 살핌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나뿐일까. 돌봄이 행위라면 살핌은 주의. 전통적인 의미와 다를지언정 돌봄에는 분명 권위가 있다. 강자에서 약자에게 행해질 수 있는 것이 돌봄이다. 그러나 살핌은 그렇지 않다. 살핌의 대상은 누구나 될 수 있다. 내 눈길이 닿는 사람, 것, 곳, 모두. 나 자신까지도 포함이다. 반대로 살핌을 행하는 주체도 누구나 될 수 있다. 아니, 누구나 되어야 한다.


돌봄이란 말은 거창할 수 있어도 살핌은 그렇지 않다. 주변에 눈길 한 번 더 주기. 그러다가 시선이 좀 더 오래 머무는 곳에 손길 한 번 더 내밀기. 그러다가 여유가 되면 조금 더 힘을 줘서 일으켜 세우기. 때로는 같이 주저앉아 버리는 날도 있겠지만, 이 일을 다른 이에게 미룰 수는 없다. 이는 어떠한 직업인의 의무가 아니라 모두의 의무이다.

 

 


더 많은 사람을 잃기 전에



저스틴은 돌봄의 의무를 저버린 스스로를 고발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저 환자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죄책감으로 변한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저스틴이 고발하는 것이 자신뿐만이 아니라 전체 사회이기 때문에 그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저스틴의 죄를 인정하는 것은 나의, 사회 모두의 죄를 인정과 마찬가지다. 우리의 허물을 덮기 위해 저스틴이 자신의 허물을 공공연히 밝혀도 우리는 눈을 감는다. 


이 연극에는 단 두 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과거와 현재의 프레드를 연기하는 헨리 나일러,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각 주인공인 조지와 저스틴부터 기타 조연, 단역까지 모두 소화하는 에밀리 카딩이 두 주역이다. 


카딩이 연기한 두 주인공 조지와 저스틴은 두 공통점을 지닌다. 첫째로는 돌보아야 하는 사람이지만 돌보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 둘째로는 사람을 잃고 나서야 돌봄의 중요성을 깨닫는 사람이라는 점. 돌봄의 중요성과 살핌의 필요성을 일찍이 깨우치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조지와 저스틴이 될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을 잃기 전에 돌보고 살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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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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