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실 그날 일정은 딱히 없는데요, [문화 전반]

글 입력 2023.10.1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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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과 접시가 치워지고 상다리가 다시 접혔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친척들 사이사이 한바탕 소란함이 지나가고, 이내 그리웠던 적막이 돌아왔다. 명절 음식이라고는 갈비찜 정도만 있고 제각각 취향대로 반찬이 푸짐했던 점심상이 물러간 뒤였다. 사춘기가 한창인 사촌동생들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는 방에 들어가 각자 핸드폰에 열중했다. 어른들은 거실이나 방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준비했다.

 

벌써 누군가의 코골이 소리가 들려와 소란해진 TV 소리와 섞였다. 잔뜩 흥분한 목소리들이 연신 ‘금메달입니다! 금메달!’을 외치는 소리. 누군가 틀어놨지만 집중해 보는 이 없던 TV 화면에서는 우리나라 선수가 메달을 딴 장면이 연이어 반복되고 있었다. 아시안게임 중이었구나. 세상일에 대한 나의 무심함에 놀라고, 분명 내가 닮았을 가족들의 무감함에 한 번 더 놀라면서, 나는 멀리 놓아둔 핸드폰을 찾았다.

 

핸드폰 화면을 켜자 뜬금없는 카톡 한 통이 와있었다. B선배. 익숙하지 않은, 그러나 분명 기억나는 이름이었다. 메시지 미리보기 창에는 정중하고 다정한 안부 인사가 적혀 있었고, 인사를 길게 늘여 쓴 탓에 정작 중요한 뒷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메시지를 읽지 않고 핸드폰을 다시 던져두었다. 배게도 없이 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다른 누군가도 잠들었는지 코골이 소리가 여러 겹으로 짙어지고 있었다. 뭘까. 어쩐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몇 년 간 연락 한번 안 했던 선배가 순수하게 반가운 마음에 명절 인사를 보냈을 리 없고. 갑작스레 내게 도움이 될 소식을 전해올 리는 더더욱 없을 테고. 혹시 불의의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가 처음 되찾은 기억 속에 나와의 소소한 추억이 떠올랐을 리, 없고. 그렇다면.


형 다음 달에 결혼하는데, 오랜만에 네 생각나서 연락했어.


역시나. 나의 육감은 매일 둔하다가 유독 이런 날에만 유난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 그러니까 이미 저녁상을 치우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돌아온 뒤에 열어본 메시지의 뒷내용이었다. 아니다 다를까 청첩 소식이었다. 답장을 써야지, 생각했는데 물기가 덜 마른 손 때문에 터치가 먹통이었다. 분명 물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손이 마를 때까지만 답장을 미루기로 했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지인이 청첩장을 보내와 기분이 나빴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자주 들었다. 나는 그게 그렇게까지 기분 상할 일인가 생각하며 의아해하곤 했다. 그 만행(?)을 직접 당하고 나서야 깨닫는 것은 그 예측 불가한 초대가 받는 이에게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 원치 않는 초대를 받는 순간 시간과 함께 잠겨 있던, 그와 나름 가까운 거리에서 우정을 나눴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 물큰 올라온다. 그 기억 속을 잠시 들여다보며, 헤집으며, 우리는 그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가 보게 되는 것. 그리고 다시, 축의금 몇 만원에 고민하며 잊고 있던 당신을 미워하게 될 나의 옹졸한 오늘로 돌아오는 것. 불쾌하다. 그 롤러코스터 같은 출렁임을 당신의 간단한 메시지 한 통이 일으키고 말았으므로. 그러나 당신은 평안하고 행복할 것이므로.

 

내 세상이 거대한 세계의 한 귀퉁이는 될 줄 알았던 그 시절. 그 장엄한 상상이 무너지며  당신과 멀어져가던 때가 기억나고 말았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으며 얼마나 진지한 고뇌에 휩싸였으며 그게 별것 아닌지 몰랐던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멋졌으며 사실은 그토록 별 볼 일 없었는지도. 내게서 멀어진 건 당신이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서히 꿈에서 깨고 있었으니까. 현실로 가면서, 이유도 모른 채, 인사도 없이, 우리는 그렇게 멀어지고 말았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 향과 같은 감각을 통해 과거를 회상하게 되는 문학적 현상이 있다고 했다. 그런 게 정말 있었구나. 카카오톡 메시지 한 통에 모든 기억이 되돌아가는, 오늘날은 아마 카루스트 효과라고 불러도 좋을 것들.

 

오늘 몇 잔 받아 마신 소주의 맛처럼 아련하고 씁쓸하다. 그래서 이제 답장을 보내려 한다. 대체로 정확한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날 별다른 일정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로 괜히 스케줄러를 확인해보고, 이렇게.


죄송해요. 그날은 일정이 있어서.


더 많이 축하 받고 싶은 당신의 날. 그 기쁜 마음 크단 걸 이해하기에 욕할 마음은 없고, 그렇다고 마냥 반가운 것도 아니기에, 거짓 없는 덤덤함을 슬쩍 덧붙여 답장을 보낸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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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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