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망각의 댓가 – 연극 밀정리스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는 이유
글 입력 2023.10.05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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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리스트 포스터.jpg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흔히들, 망각 또한 신의 축복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잊음으로써 골치 아픈 생각을 덜게 되어 고통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명제는 한 국가의 역사, 특히 독립운동 역사에 관해서는 참인 명제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잊는다면, 순국선열분들의 아픔이 되려 커지게 된다.

 

연극 ‘밀정리스트’는 극발전소 301에서 만든 극으로, 9월 20일부터 10월 1일까지 대학로에서 공연이 열렸다. 1929년 경성에서 일본 총독 암살 거사를 준비하는 의열단 단원들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일제의 탄압에 거사의 성공을 두고 불안에 휩싸인다.

 

상해에서 권총과 폭탄, 군자금 모금 명부를 들고 온 김충옥을 필두로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사이토 일본 총독을 암살할 거사를 준비하는 의열단원들. 하지만 거사 당일 계획과 다른 현장에 실패로 끝이 나고, 의열단원 간 불신이 싹 튼다.

 

거사를 함께 준비한 의열단원은 김충옥과 김충옥의 동생 김명순, 김충옥과 어린 시절부터 막역한 동생 사이인 최태규와 신화진, 그리고 탄약에 일가견이 있는 정설진으로 이뤄져 있다. 과연 이들 중 누가 밀정일까.

 

연극을 보며 김충옥 입장에 몰입해 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가려내느라 긴장감 있게 볼 수 있었다. 실패한 현장의 뒷이야기를 두고 서로 다르게 주장하고, 밀정으로 의심받을 때 점점 격양되는 배우의 연기가 인상 깊었다.

 

이번 기사에서 누가 진짜 밀정이었는지는 밝히지 않을 작정이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극을 다 본 뒤 느낀 감상 탓이 더 크다. 사실 이 연극은 밀정이 누구인가 추리하는 재미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독립 열사들 가운데 밀정이 심심치 않게 많았었다’는 사실이다.

 

의열단 중에서도 밀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일본 경찰 가운데 밀정이 있기도 하다. 우리는 편하게 가치 판단을 끝내기 위해, 밀정은 처음부터 밀정이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진심으로 독립운동에 임했으나, 불투명한 미래에 일본으로 배신한 경우도 많다.

 

밀정리스트의 정범철 작가는 해당 연극을 집필하게 된 계기가 KBS 탐사보도부 다큐멘터리였다고 밝혔다. 취재를 통해 밀정 혐의자는 895명이라고 드러났으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밀정은 2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더불어 대다수의 밀정이 독립운동가로 기록돼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고 한다.

 

 

밀정리스트 배우들 사진.jpg

 

 

해방 이후 바로 이어진 남과 북의 분열로 친일 역사 청산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연극의 끝에 다다르면서, 밀정이 밝혀지고 충옥이 밀정에게 어떻게 돈 몇 푼에 우리를 팔아넘길 수 있냐고 처절하게 소리 지른 모습이 떠오른다. 또한 밀정이 자신이 밀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의열단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주권을 되찾는 날까지 우리가 살아 있을 수 있는지. 그저 일본으로부터 목숨을 보장받고 싶었을 뿐이라고. 주권 회복보다 당장의 나와 내 가족의 목숨 보전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이어졌다.

 

쉽게 반박하기 어려운 말이다. 특히 저 당시를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에이~ 그래도 무조건 배신은 안 되지’라고 지적하는 건 속 편한 이야기 같다. 하루하루가 총성과 탄압으로 점철되었다면, 어느 순간 지치게 되고 포기하고 싶은 것 또한 자연스러운 변화일 테니.

 

하지만 앞으로 누구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충옥에게 충옥의 친구가 건넨 한마디를 듣고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야.’

 

믿었던 주변인의 배신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독립운동의 길을 걸은 열사분들 덕분에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는 것이다. 당장의 어려움에도 합리화를 택하지 않고, 살아 있을 때 독립이 올 것이라는 확신도 없는 상태에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 라고 생각하며 항일 운동을 이어간 분들 덕분이다.

 

밀정의 긴 변명과 달리 짧고 묵직한 다짐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연극의 하이라이트는 막이 내린 뒤다. 벽 한 켠에 빔프로젝터로 엔딩 크레딧을 상영한다고 생각했는데, 벽을 가득 채운 명단은 895명의 밀정리스트였다. 강 씨부터 김 씨, 차례대로 이름이 줄지어져 황 씨까지 나온다.

 

정말 다양한 성씨, 많은 사람이 있었다. 몇 분 동안 고요하게 이어지는 밀정리스트 화면으로 우리의 망각으로 놓치고 있었던 독립 운동가들의 억울함과 아픔이 무겁게 느껴졌다.

 

항일 역사의 아픈 민낯, 아프다는 이유로 망각해 버리면 남겨진 것은 더 곪게 되는 상처와 아픔뿐이다. 어떤 환난 가운데도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나라의 진짜 역사를 마주 볼 수 있어 좋았다.

 

연극 공연 특성상, 바로 눈앞에서 배우들의 열연이 펼쳐져 싸우는 장면에서는 괜히 시선을 내리게 될 정도로 현장감이 생생하다. 덕분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독립열사의 열정과 애환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들의 고뇌를 경험해 보고 싶다면, 연극 밀정리스트를 추천한다. 잊지 않고 기억해야 나라의 미래를 지킬 수 있다.

 

 

[이도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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