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초파리를 돌보는 사람들 [도서/문학]

사회에서 요구되는 '돌봄'에 대하여
글 입력 2023.10.0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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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리를 돌본 적이 있는가? 자식이나 반려동물, 타인을 돌본 적은 있어도 초파리를 돌본 이는 없을 것이다. 임솔아 작가의 소설집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에 수록된 단편소설 「초파리 돌보기」는 이러한 이유로 ‘소설’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서 독특하지만, 현실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인물과 독자로부터 변화를 이끌어내는 결말을 담고 있다. 소설로 인한 독자의 변화란 소설을 읽은 후 독자의 내부에서 변화가 일어나거나 소설이 주는 메시지를 생각해 봄으로써 사고의 확장이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 역시 독자로서 「초파리 돌보기」를 읽고 내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공유해 보고자 한다.




초파리를 돌보는 원영



원영은 ‘오십 대 무경력 주부’이다. 무경력이라기엔 가발 공장, 외판원, 마트 캐셔, 급식실 조리원 등의 일을 했지만, 어느 면접에 가든 그리 취급된다. 그러나 원영은 쉬지 않고 일을 해온다. 자기 일을 갖고 싶어 한다.


 

원영은 자기 일을 갖고 싶었다. 집을 갖고 싶다거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여느 사람처럼 그랬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33년 동안 그랬다. (……) 거위들이 원영을 알아보고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원영은 느낄 수 있었다. 오랜 꿈이 이루어졌다.

 

「초파리 돌보기」 중


 

그런 원영이 텔레마케터 일을 같이했던 미선의 소개로 과기원에서 다양한 연구에 쓰일 초파리를 양육하는 일을 하게 된다. 직업에 대한 원영의 바람은 당연하다. 다른 이들이 집을 갖고 싶고 아이를 갖고 싶은 것처럼. 그 당연함을 33년 동안 꿈꿔온 원영에게 연구원에서 제공하는 새 흰 가운과 멸균 처리된 도구는 그간 했던 일과 달리 그녀가 하는 일을 ‘직업’이라고 느끼게 한다. 특히 과기원에 사는 거위들이 원영을 알아보는 것을 보고 원영은 자신이 과기원의 일원이 되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초파리를 돌보면서 원영은 그들의 탄생과 짧은 생, 생김새에 기특함과 아름다움을 느낀다. 오죽하면 폐기 처분될 초파리들을 몰래 훔쳐 딸 지유에게 보여주기까지 한다. 원영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한다. 다시 말하면 초파리를 ‘돌보는’ 일에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원영은 모순적이게도 돌봄에 대해 동시에 부당함을 느낀다. 


 

원영은 소설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척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 “근데 이 택배 기사가, 이후로 원영이만 보면 욕을 하는 거야. 남편한테는 아무 말 안 하면서. 아줌마, 내 눈 쳐다보지도 마쇼. 막 눈을 뽑아버린다고 그러고. 근데 원영이는 남편한테 암말도 못하는 거야. 세상이 얼마나 무섭니 지유야. 싸움이 커졌다가 해코지하면 어쩌나 싶은 거지. 집 주소도 알고, 공동 현관 비밀번호도 아는데. 해코지도 원영이한테 할 거 아니니. (……)”

 

(……) 평생 자기 책상을 가져보지 못해서 아프기 시작한 여자 이야기. 식기세척기를 구입하면 어떻겠냐고 물으면서도 책상이 필요하지 않으냐고는 한 번도 묻지 않는 가족 이야기. 밀가루가 체질에 맞지 않아 늘 위무력증에 시달렸지만 남편이 국수를 좋아해서 30년 동안 국수를 먹은 여자 이야기. 체할 때마다 그러게 왜 국수를 먹느냐고 다그치던 딸 이야기. 그러면서도 일요일 저녁이면 와, 국수다,라며 손뼉을 치던 딸 이야기……

 

「초파리 돌보기」 중

 


원영에게는 여성으로서, 더 구체적으로는 엄마로서 가족을 돌보면서 겪었던 부조리와 상처가 있다. 택배 기사가 자신에게 해코지할까 봐 두렵다고 말하지만, 앞서 말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택배 기사가 집으로 찾아와 혹여나 가족에게 해를 가하면 어쩌나 걱정하는 것 같다. 왜 국수를 먹느냐고 다그치던 지유가 일요일 저녁 국수를 반가워해도 원영은 3년 만에 집으로 오는 지유를 위해 지유가 어릴 적 좋아했던 첵스초코를 사둔다.


원영은 돌봄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돌봄을 행한다. 초파리를 돌보는 것에 만족하는 이유는 집과 과기원, 가족과 초파리는 엄연히 다르고 그것을 구분하기 때문이겠지만, 당연하다는 듯 가족을 계속해서 돌보는 원영의 행동은 만족과는 다른 영역으로 보인다.


원영의 생애 일부를 간략하게 보여주는 문단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주변 사람들은 왜 일을 하느냐 했다. 집에 있어도 되지 않느냐 했다. 딸에게 개인 교습을 시켜줄 수는 없었지만, 학원에 보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학원에 보낼 형편이 안 되었던 시절에도 원영은 비슷한 말을 들었다. 학원비 몇 푼 버느니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편이 낫지 않냐는 식이었다.

 

「초파리 돌보기」 중

 


쉬지 않고 일해온 원영에게 주변 사람들은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집에 있으라는 말을 한다. 사회는 여성이자 엄마인 이들에게 ‘돌봄’이라는 역할을 요구하고 어떨 때는 강요한다. 당연하다는 듯이 집에 있으면서 아이를 돌보는 편이 낫지 않느냐고 이야기한다. 원영을 오십 대 무경력 주부로 취급한 고용주들도 마찬가지이다. 원영은 이런 사회의 틀에 자신도 모르게 맞추어지고 길들어진다. 원영이 자신만의 직업을 갖길 원하고 그 직업으로 초파리를 돌보는 일을 하게 된 것도, 그것에 만족하는 것 또한 원영의 온전한 꿈이 아니라 사회의 요구와 기대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영은 폐기 처분될 초파리를 몰래 가지고 온 이후부터 아프기 시작한다. 몸살 같은 흔한 증상이 아니라 두피가 훤히 드러날 만큼 머리카락이 빠지고 음식을 삼키지 못하고 게워내며,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앙상해진다. 


 

지유는 오십 대 여성이 겪는 지독한 갱년기 증상 정도로 여겼다. (……) 갱년기 때문에 음식을 못 삼킬 수는 없었다. 원영의 몸은 11년 동안 꾸준히 약해진 것 같았고, 이제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산재다. 지유는 의심이 들었다. 초파리 실험실에서부터 원영이 잘못된 것이다.

 

「초파리 돌보기」 중

 


지유는 원영에게 실험동에서 근무하면서 마스크나 장갑은 꼈는지, 함께 일했던 동료나 실험 주도 교수는 누구였는지, 이상하다고 느낀 게 있었는지 닦달하며 묻는다. 그러나 원영은 자기방어를 하듯 실험동과 초파리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되풀이한다. 오히려 근무하면서 지각했던 어느 날, 손 씻는 것을 잊어버려 원영이 손댄 초파리들이 다 죽어버리는 일이 있었다며 굳이 따지자면 해를 끼친 쪽은 초파리가 아니라 자신이라고 원영은 말한다.


실험동에서 초파리를 돌본 이후부터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사실은 원영 본인이 가장 잘 느끼고, 아는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원영이 이토록 초파리를 철석같이 옹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유의 소설 속에서, 원영은 초파리를 들여다봤다. 초파리가 아름답게 표현돼 있었다. 이 소설에서 원영은 결말 부분을 가장 좋아했다. 모든 것이 초파리와 실험동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초파리 돌보기」 중

 


앞서 언급했듯 원영은 초파리를 돌보면서 오랜 꿈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원영에게 초파리 돌보기는 집에서 가족을 돌보는 것과 확연히 다르고. 텔레마케팅하며 고객에게 쌍욕을 듣지도, 온 힘을 써가며 물건을 팔고 대용량 급식을 만들지 않아도 되는 꿈이자 직업이다. 그토록 원하던 것을 원영은 신체에 좋지 않은 화학 물질이 가득한 장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을 터다. 지유의 의심이 사실이 되면 겨우 이룬 자신의 꿈이 사라지게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원영은 몸이 상해감에도 불구하고 초파리 돌본 기억을 꿈의 장으로 남겨두고 싶어 한다. 어떤 이는 소중한 기억 하나만으로도 생을 이어가고, 원영 또한 그런 것 같다.

 

 

 

자꾸만 잊는 지유



원영의 딸 지유는 소설 작가이다. 스쳐 지나가는 사소한 일상도 놓치지 않고 기억했다가 소재로 사용하곤 하는 직업이지만, 지유는 언젠가부터 자꾸만 잊는다. 소설 또한 마찬가지다.


 

소설을 쓰면서 지유는 종종 시작점을 잊어버렸다. 어떤 생각이나 장면으로부터 소설이 시작된 것인지에 대해서. 이유는 분명 있었다. 그 소설을 써야만 한다고 결심하게 만든,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런 게 있었다는 것만 기억이 났다. 소설을 처음 쓰게 된 이유라거나, 작가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 이제 지유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잊어서는 안 되었던 무언가가 아니라, 중요한 것을 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초파리 돌보기」 중

 


지유는 원고 마감일이나 출판사와의 미팅뿐만 아니라 소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 즉 자신이 앞으로를 살아내기 위한 선택의 이유마저 잊은 채 살아간다. 사는 이유가 없고 목표가 없다. 직업에 대한 꿈이 확실한 원영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지유는 왜 어느 순간부터 중요한 것들을 잊게 된 걸까?


 

다음 장에는 기억과 망각에 대한 초파리 연구 기사가 있었다. 기억 정보를 운반하는 단백질이 바이러스의 흔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망각은 뇌 용량의 한계에 의해 수동적으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망각세포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파괴 기능이라는 것이었다.

 

「초파리 돌보기」 중


 

“이유를 잊게 되는 원인이 있을 거예요. 스트레스 상황이 반복되면서 단기 기억력이 나빠진 것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유를 잊어야만 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워진 게 아니라 필요에 의해 치워졌다고 해야 할까요.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원인과 이유가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종내는 알게 돼요. 그 불일치가 나한테는 원인인 것 같아요.”

 

「초파리 돌보기」 중


 

원영이 보여준 초파리 연구 기사와 지유와 같은 직업을 가진 소설가 신치온의 말을 보면 우리는 지유가 왜 망각 상태에 빠져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잊히는 것과 잊는 것은 다르다. 치온의 말을 빌려 조금 더 쉽게 이야기해 보자면, 이유를 잊게 되는 원인과 이유를 잊어야만 하는 원인은 다르다. 고로 원인과 이유가 일치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이나 스트레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사라지는 건 잊히는 것이지만, 무언가가 싫고 끔찍해서 지우고 싶은 건 망각 세포의 적극적인 파괴 기능으로 잊게 된다. 잊고 싶어서 잊는 것이다. 지유는 삶을 이루는 것과 살아가는 이유를 찾지 못한다. 차라리 잊고 싶을 만큼.


그러나 망각 속에서도 지유가 절대 잊을 수 없는 게 있다. 이를테면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지고 집 안에서도 털 모자를 쓰고 있어야 할 정도로 아픈 엄마, 원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건강해지는 결말로 소설을 써달라고 말하는 엄마. 원영은 마치 지유의 망각 상태를 알고 있는 듯 틈만 나면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달라며 연락해온다.


 

지유야, 원영이가 안 나으면 엄마가 너무 괴로울 것 같아. 다 낫는 걸로 써주었으면 해.

지유야, 전화를 안 받네. 혹시 서운한 거 아니지?

지유야, 무슨 일 있어?

마지막 문자에는 다 잊어달라고 적혀 있었다. 지유가 쓰고 싶은 대로 쓰면서 살라고, 별일 없다는 문자 하나만 보내달라고.

 

「초파리 돌보기」 중

 


다 잊어달라는 말에도 지유는 잊을 수 없다. 지유가 원영을 만나러 가지 못한 3년 내내 원영은 아픈 건 다 나았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만 말했다. 나중에는 원영에게 안부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 또한 원영의 돌봄이었다. 지유는 원영의 바람대로 초파리와 원영을 담아 소설을 쓴다. 




원영과 이 원영의 행복



지유가 소설을 쓰기 시작할 즈음, 원영은 초파리에게 로열젤리를 투여했더니 초파리의 산란능력과 수명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는 실험 기사를 접한다. 로열젤리를 먹으면서 원영은 차츰 건강해진다. 체모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한 발로 계단을 오르지 못했던 시기를 잊고 매일 바깥을 걷는다. 원영이 원했던 지유의 소설처럼 해피엔드로 끝날 것 같던 「초파리 돌보기」는 상상치도 못한 결말로 독자를 순식간에 흔들어놓는다.


 

원영을 괴롭혔던 미진단 질병은 초파리와 실험동 때문일 수 있다고, 지유는 여전히 생각했다. 아니면 노화의 수순일 수도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노화가 서서히 자연스럽게 오고,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위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원영이 지유에게 소설로 써달라고 했던 그 모든 사연의 총합이 원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지유의 소설도 사연의 한 부분일 것이다. 가장 시시한 문장으로 지유는 소설을 끝맺었다. 이 원영은 다 나았고, 오래오래 행복하다.

 

「초파리 돌보기」 중

 


마치 이 모든 게 지유가 쓴 소설이었다는 것마냥 「초파리 돌보기」는 원영이 다 낫는 결말로 마무리된다. 이 결말에는 진실과 거짓, 현실과 비현실, 지유의 소설 내부와 소설 외부가 혼재한다. 원영이 실제로 다 나았거나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원영을 절대 잊지 못한 채 지유가 원영이 다 낫는 결말로 소설을 썼거나. 예상치 못한 반전에 독자는 어느 쪽도 확신하지 못하고 소설을 되짚어보며 자신의 관점에서 결말을 해석하게 된다. 글 초반에 언급했던 소설이 변화를 맞이하면서 독자 또한 변하고 사고의 확장이 발생한다.


 

왜 그렇게 걱정을 사서 하느냐고 하면 원영은 자신의 기억을 들려주었다. “한 열댓 살 때였나, 아랫동네에 진숙이라는 애가 살았는데, 진간장을 국간장으로 잘못 샀나 그래서 혼자 슈퍼에 갔다가……” 사소하게 시작되어 암담하게 끝이 나는 이야기들이었다.

 

「초파리 돌보기」 중


 

원영의 결말은 원영이 들려주었던 이야기처럼 사소하게 시작하여 암담하게 끝났을까. 아니면 가장 시시하고도 뻔하게 다 나았고 오래오래 행복했을까.

 

나는 시시한 쪽을 택하고 싶다. 원영이 뻔하게 오래오래 행복했으면 한다. 

 

세상에는 원영처럼 사회가 기대하고 요구하는 역할을 자신의 꿈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그것으로 되었다며 만족할지도 모른다. 초파리를 돌보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초파리 말고 스스로를 돌보는 건 어떻겠냐고. 초파리가 아니라 우리가 시시하게 행복하자고.


 

[변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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