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무선 양장 노트 [사람]

글 입력 2023.09.30 11:3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1. 구겨지는 책등을 신경 쓰지 않고 과감하게 표지를 펼치기

2. 샤프와 자로 줄을 긋고 글씨 쓰지 않기

3. 기록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쓰기

 

 

저게 무엇인가 싶지만 내가 처음으로 무선 양장 노트를 펼칠 때 글씨 예쁘게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중얼거리며, 마음을 다잡고 하는 일들이다. 처음 쓰는 노트에 대한 나의 비장한 선언이랄까.

 

노트를 펼치고 내가 먼저 하는 일은 지워지지 않는 아무 펜이나 들고 생각나는 것을 쓰는 것이다. 책의 한 구절이어도 좋고, 일기여도 좋고, 서점 문구 코너, 볼펜 테스트지의 문장들처럼 ‘안녕하세요’, ‘제트스트림 0.38mm’여도 좋다. 마음대로 써 내려간 문장을 보고 나면 이 공책은 이제 되돌릴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숨길 필요 없이 모든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든다.


이전에 내가 사는 공책은 주로 유선 스프링 노트였다. 유선 스프링 노트의 장점은 맞추어 쓸 줄이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페이지는 가차 없이 찢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공책의 밑줄만큼이나 반듯한 스프링에 맞춰 공책을 찢으면 어떻게 찢어도 티가 나지 않는다.

 

반듯한 노트에는 그 외관만큼이나 그럴듯한 이야기들만 담겼다. 말끔한 이야기들만 쌓인 그 노트에 완벽하지 않은 이야기를 남기는 것은 두려웠다. 실수를 기록하면 주홍 글씨처럼 그 실수가 나를 따라다닐 것 같았다. 그렇게 맘에 들지 않는 페이지를 찢어버렸고, 노트는 다시 새 노트가 되었다. 하지만 계속 찢어나가다 보면 마지막에는 스프링에 페이지가 듬성듬성 비어 있는 엉성한 노트가 된다.

 

어쩌면 나는 기록을 열망하면서도 기록의 본질을 잊은 채 그것을 열망하고 있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줄을 벗어난 글씨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나의 결핍과 마주하는 것 역시 두려워했다. 그래서 규칙이 없는 무선 양장 노트를 사는 데까지는, 그곳에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담아내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선 양장 노트를 쓰면 어느새 보이지 않는 줄을 벗어난 문장들도 눈감아줘야 하고, 맘에 들지 않는 페이지를 찢어버릴 수도 없다. 찢어버린 페이지에는 너무 명확한 자국이 남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마음과 두려움으로 그 페이지를 찢어버렸는지는 글씨보다도 더 명확하게 기억 속에 남는다.

 

 

people-2587310_1280.jpg

 

 

그렇게 채워간 무선 양장 노트에는 내가 제일인 것처럼 작은 성취에 행복했던 일기도 있고, 나만 제자리인 것 같다고 투덜댔던, 자존감이 바닥을 찍은 날의 일기도 있다. 일기뿐만이랴, 무작정 부산으로 떠났던 날의 비행기 표, 그리고 일확천금을 기대하며 샀던 로또도  붙여져 있다.

 

투박한 노트를 보면서 나를 채우고 있는 것이, 내가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린다. 그렇게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들로 채워진 노트의 모든 것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노트는 자꾸만 나를 알게 했다. 물론 너무 솔직하고 자세하게 적어둔 탓에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도 있었다. 노트를 채우는 것은 동시에 나도 모르게 숨겨 놓은 나의 마음을 들춰보는 일이었다. 흐트러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덕에 오롯이 마주한 나에 안온함을 느낀다.

 

마음에 들지 않는 페이지를 찢어버릴 수 없는 것처럼 그 또한 나의 삶의 일부라는 것을 느꼈을 때 나는 더 과감해지고 솔직해질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줄에 맞춰져 반듯하게 쓰인 이야기들만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반듯하기도 흐트러져있기도 한 그 기록들은 결국 지금의 나를, 앞으로의 나를 뚜렷하게 만들고 있다.

 

 

[오은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