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양 [도서/문학]

글 입력 2023.09.16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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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斜陽)은 ‘저녁때의 햇빛’을 뜻한다. 다시 말해, 사양은 한낮의 밝음과 밤의 어둑함만이 아닌 음영의 순간을 의미한다. 음영은 빛과 그림자의 대조를 통해 선연하게 서로를 보여주는데, <사양> 역시 제목과 같이 미묘하게 교차하는 대조의 작품이었다.

 

작품은 패전 후 몰락해 가는 어느 한 귀족의 모습을 담고 있다. 몰락의 격변과 비애, 그리고 주인공 가즈코와 그의 가족들의 혼란은 소설 전체에 깊이 녹아 있다. 가장 집중해서 보았던 축은 주인공 가즈코와 그의 동생 나오지가 보여주는 희망과 절망의 대조였다.

 

경제적, 입지적으로 무너져감에도 불구하고, 가즈코는 희망적인 인물이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서 살아온 것이다.’라는 문장은, 그녀의 전진적인 태도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그녀의 모습은 소설이 전개될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변한다. ‘나는 살아남아서, 생각한 일을 이루기 위해 세상과 싸워나가자.’, ‘낡은 도덕과 끝까지 싸우며, 태양처럼 살아갈 생각입니다.’로 강화되는 그녀의 의지와 희망은 태양과 같다.

 

혹자는 가즈코를 페미니즘적 위상을 드러낸 인물로 평가한다. 작금의 시대상을 생각해봤을 때, 가즈코의 페미니즘적 모습을 온전히 인정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다만, 194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일본이라는 국가적 특징을 고려하면 가즈코의 행보를 여성주의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틀이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맞춰져 있지만, 틀에서 움직이는 폭이 다소 여성주의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나오지는 패전 이후의 절망과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는 인물이다. 데카당(décadent)은 퇴폐와 타락을 뜻하는 프랑스 단어인데, 나오지는 이런 데카당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학, 절망, 파멸,향락의 태도를 지니고 있으며 과도기적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다.

 

더불어, 그의 데카당은 매우 불안하다. ‘나는 단지 귀족이라는 자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미치고 놀고 무절제했던 것입니다.’라는 그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단지 현실에서 미친 듯이 발버둥 치고 있다.

 

소설 후반부, 나오지의 유서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인상 깊었다. ‘나는 살아있는 괴로움과, 그리고 그 혐오스러운 생에서 완전히 해방될 나의 기쁨‘, ’내게는 희망의 지반이 없습니다…결국 나의 죽음은 자연사입니다. 사람은 사상으로만으로 죽을 수 없는 법이니.’ 등등. 그의 유서를 읽고 있으면, 자연스레 그의 죽음에 설득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의 무책임한 여러 행동이 정당화되지는 않지만, 최소한 비난의 여지가 꺾이는 묘한 기분이었다. 카뮈는 묻는다. “왜 자살하지 않는가?” 단순한 삶의 연명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는 점. 죽지 않아야 할 이유를 대는 일은 어렵다는 점은 나오지의 선택에 대해 침묵하게 해주었다.

  

유서는 ‘누나, 나는 귀족입니다,’로 마무리되는데, 이때 심장이 덜컹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 나오지가 작가의 페르소나 같다는 인상을 받기도 하였다. <인간 실격>보다 자전적인 정도가 덜하지만, 나오지 모습 또한 다자이 오사무의 일생과 상당히 닮아있었다.

 

가즈코와 나오지의 모습 말고도 어머니, 외삼촌 등에서 입체적인 감상이 가능한 작품이었다. 분량이 길지는 않지만, 특유의 향과 감성이 매우 깊었고 다양한 접근이 좋은 작품이었다.

 

읽을수록, 내가 부끄러운 글이 있다. ‘거칠게 읽으면 부서지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생기는 글이 있다. <사양>을 읽는 내내, 너무나 섬세하고 아름다워 괜히 조심성이 생기기도 하였다.

 

가즈코는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행복감이라는 것은 비애의 강바닥에 잠겨 희미하게 빛나는 사금과 같은 것 아닐까?’ 희미하게 빛나는 행복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바닥 중,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살아야 할 것인가. 가즈코와 나오지. 두 인물의 교차와 대조는 인간과 사회 근원에 있는 실존적 물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행복과 고통은 사양((斜陽)처럼 뒤섞여 서로의 모습을 부각한다. 선택하고, 선택당하는 행복과 고통 속 인간의 위치에 대해 고심하게 해 준 소설이었다.

 

 

[김민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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