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의 삶이 건네는 말 - '헬렌 앤 미' 최현미 작/연출

글 입력 2023.09.12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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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앤 미] 2023 일정만.jpg

 

 

헬렌 켈러의 이야기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시각장애와 청각장애가 있는 소녀가 헌신적인 설리번 선생님의 도움으로 ‘Water’의 의미를 깨우치는 순간은 감동적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는 수많은 단어로 자기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어른이 된다. 선생님이던 앤 설리번은 이제 헬렌의 친구이자 동반자로서 그의 인생에 함께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미지의 인생을 개척해갔다. 뮤지컬 <헬렌 앤 미>는 이 두 사람이 자신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용으로, 뮤지컬 <앤ANNE>으로 알려진 극단걸판의 작품이다.


2018년 초연을 선보였던 <헬렌 앤 미>는 팬데믹을 지나면서도 꾸준히 무대에 올랐고, 올해에는 7월부터 12월까지 전국 7개 공연장에서 관객을 만나는 중이다. 지난 4일, 안산 공연을 앞두고 <헬렌 앤 미>의 최현미 작/연출을 만났다. 극단걸판의 대표이기도 한 그는 벌써 20년 가까이 공연을 만들어 왔지만, 새로운 도전 앞에서 늘 적극적이다. <헬렌 앤 미>를 2021년부터 배리어프리 공연으로 만든 것 역시 도전의 일환이다. 그는 여전히 더 나은 공연, 무대와 객석이 함께 위로받을 수 있는 공연을 꿈꾼다.

 

 

 

어른이 된 헬렌 켈러



극단 걸판 대표,연출 최현미 프로필.JPG

 

 

최현미 연출님, 안녕하세요. <헬렌 앤 미>는 어떤 작품인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두 사람이 보드빌 극장에서 배우들과 함께 자신들의 이야기를 공연으로 만든다는 콘셉트의 창작 뮤지컬이에요. 둘의 일대기를 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걸판의 다른 작품인 <앤ANNE>도 극장에서 연극을 만들며 시작하는 이야기였죠.


제가 공연 만드는 사람이다 보니 그런 접근 방식에 마음이 끌리는 것 같아요. 그리고 헬렌 켈러의 일화를 찾다가 실제로 헬렌과 앤 두 사람이 보드빌 극장 무대에 오른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정식 공연은 아니었지만, 극장 측의 제안으로 관객들에게 자신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공연에 그 일화를 활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우리는 보통 헬렌의 어린 시절 이야기만 많이 알고 있잖아요. 저는 이후의 이야기도 다뤄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인물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는 방식이라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위화감 없이 함께 전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Helen Anne Me 02.jpg

 

 

헬렌 켈러를 주인공으로 하는 극을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헬렌 앤 미>의 시작은 2018년에 시각장애인분들과 협업한 단막극 <춤추는 헬렌 켈러>였어요. 그 이후 헬렌 켈러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뮤지컬이라면 음악이 중심이 되니까 언어장애가 있었던 헬렌 켈러의 삶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실제로 이 작품에서 헬렌은 대사가 거의 없어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노래로 전하죠.

 

 

그렇게 <헬렌 앤 미>가 탄생한 것이군요. <춤추는 헬렌 켈러>와 비교하면 무엇이 달라졌나요?


<춤추는 헬렌 켈러>는 야외에서 하는 30분짜리 공연이었어요. 그때는 헬렌 켈러가 어렸을 때 앤 설리번의 도움을 받아 ‘물’이라는 단어와 개념을 익히는 게 주된 내용이었어요. 이후 뮤지컬로 만들면서는 헬렌이 어른이 된 이후 헬렌과 앤의 이야기까지 담아내려 했습니다. 2018년 가을에 초연을 했고, 2021년부터는 배리어프리 공연으로 또 한 차례 변화를 겪었어요.


초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강조하고 싶었던 건 헬렌 켈러가 단순히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는 장애인이 아니고, 앤 설리번도 그 조력자에 그치지만은 않는다는 거예요. 두 사람은 오랜 세월 함께하며 우정을 나눴던 인생의 동반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헬렌 앤 미>로 이들이 살아온 시간을 상상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에서 인생의 동반자가 된 앤 설리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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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제목의 ‘앤’도 ‘그리고’라는 의미의 ‘앤드(and)’가 아니라 ‘앤 설리번’의 ‘앤(anne)’이라고 들었어요. 


맞아요. 많은 분의 예상과 달리 뮤지컬 제목의 ‘앤’은 앤 설리번의 이름이에요. 그러니까 ‘헬렌과 앤과 나’인 거죠. 저희는 앤도 이 작품에서 헬렌과 같은 비중을 가진 주인공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헬렌과 앤이 서로 돕기도 하고 때로는 지지고 볶기도 하면서 함께 인생을 개척해나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지지고 볶았다는 얘기가 재미있네요.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공부하며 새롭게 알게 된 두 사람의 일화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헬렌이 학교를 다닐 때 월경을 시작해서 생리통으로 힘들어한 적이 있었대요. 사람들이 그걸 보고 월경 때문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하고 보호자인 앤이 헬렌을 학대한다는 소문이 퍼진 거예요. 지금도 그렇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은 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만 부각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당시에도 헬렌 켈러가 다른 여성들처럼 월경을 한다는 게 잘 그려지지 않았나 봐요. 그때는 지금처럼 월경통 이야기를 많이 할 때도 아니고요. 앤의 보호자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는 움직임까지 있었는데, 헬렌이 변호를 해줘서 계속 함께할 수 있었다고 해요. 인상적인 일화였어요.


앤의 이야기도 흥미로워요. 앤이 어렸을 때 빈민구호소에서 살며 시력을 잃었다가 되찾은 적이 있다고 해요. 일시적이었지만 헬렌과 같은 경험을 해본 거죠. 그런데 몇십 년간 헬렌과 가까이에서 함께하는 동안 이 이야기를 헬렌에게 들려준 적이 없다고 해요. 나중에 50대가 넘어서 자서전을 쓸 때야 그 얘기를 처음 했어요. 그런 지점이 의외였어요.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도 하게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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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연출로서 <헬렌 앤 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무엇인지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헬렌이 부르는 ‘상처가 나면 어때’라는 넘버가 있어요. 이때 과거에 이들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과 현재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함께 등장해 과거와 현재가 교차해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헬렌이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는 내 몸에 상처와 흉터가 있어도 그게 다 내 세상이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된다는 내용이에요. 장미꽃에 손을 뻗었다가 가시에 찔렸다 해도 내가 다시 장미에 다가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고도 해요. 헬렌 켈러가 실제 수기에 썼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가사예요. 이것이야말로 헬렌이 자신의 삶 속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하면서요.

 

 

<헬렌 앤 미>는 2021년부터 베리어프리로 공연된다는 것에도 의의가 있을 것 같아요. 배리어프리 공연을 만들며 시행착오는 없었나요?


뮤지컬을 배리어프리로 공연하는 경우가 아직 많지 않다 보니 당연히 처음에는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어디부터 어디까지 준비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어려웠죠. 다행히 시간이 지나며 좋아지는 중이에요. 무엇보다 수어통역사분들께서 열정과 애정을 갖고 임해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래를 놓치지 않고 통역하기 위해 가사를 통째로 외워서 거의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진행하는 식이죠. 배리어프리 공연이 좀 더 많아지고 잘 정착할 수 있도록 함께 열심히 해보는 중입니다.

 

 

 

객석과 무대가 함께 위로받는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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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님이 공연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이 <헬렌 앤 미>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주제를 정해두고 작업을 하는 건 아닌데, 하다 보면 삶에 대한 위로와 응원을 화두로 하는 작품을 만들게 되더라고요. 자연스레 위로의 방식을 계속 고민해요. 저는 무대 위의 인물과 객석에 있는 관객이 함께 위로받는 순간을 만들려 노력해요. 관객들이 무대 위 이야기에서 자신의 삶과 맞닿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헬렌 앤 미>의 ‘미(me)’도 그런 의미로 넣었어요. 헬렌과 앤의 삶이 시대와 나라는 달라도 우리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고 믿었거든요. 관객분들이 두 사람의 삶에서 나의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길 바라는 마음이 제목에 담겨 있습니다.

 

 

극단 걸판에서 20년 가까이 시간을 보내셨는데요, 앞으로의 10년, 20년은 어떤 마음으로 연극을 하고 싶은지도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젊음의 패기로 앞만 보고 달리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는 이거 해보자, 저거 해보자 아이디어가 많아서 새로운 걸 계속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어요. 이제는 새로운 것도 좋지만, 우리가 좀 더 오래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생각하게 돼요. 한 작품을 해도 이 작품이 어떻게 하면 더 긴 생명력을 갖고 오랫동안 관객을 만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거죠. 그러려면 좋은 아이디어 못지않게 기획과 홍보 같은 실무 능력도 갖춰야 해요. 그런 역량이 있는 걸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안산 공연 외에 앞으로 예정된 <헬렌 앤 미> 공연 일정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헬렌 앤 미>는 공연유통협력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12월까지 7개 공연장에서 공연을 해요. 안산 공연이 세 번째고, 이후에는 고양, 제주, 부산, 김포 공연이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헬렌 앤 미>가 관객 여러분의 삶에 위로와 응원이 되는 공연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공연은 베리어프리의 일환으로 ‘릴랙스 퍼포먼스(Relaxed Performance)’를 지향해요. 관객의 입·퇴장, 소리와 움직임이 비교적 자유로운 공연이라고 생각하시면 되는데, 이런 환경이 낯선 분들도 계실 것 같아 미리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섞여서 공연을 보는 경험이 우리 모두에게 부족하기에 저희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제는 배리어프리 공연이 어떻게 잘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인 것 같아요. 특히 릴랙스 퍼포먼스의 저변이 확대되고 함께 더 나은 관극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이번 공연도 그 과정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공연을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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