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처서 매직

여름을 보내며
글 입력 2023.09.04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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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대낮처럼 밝은 저녁과 땀이 마른 얼굴로 지나가는 작은 바람에도 감사할 줄 아는 적당한 더위, 그리고 세차게 울어대는 매미 울음소리에 가슴이 설렜다.


매해 갱신되는 최고 기온에 혀를 내둘렀지만, 올해는 유독 덥고 습했다. 역대급일 거라 장담했던 장마철을 대비해 레인부츠를 장만했고, 불행하게도 부츠를 신은 날에는 금세 비가 그치곤 했다.

 

코로나와 함께하는 여름은 올해가 처음이 아니건만 30도를 훌쩍 넘은 기온에 마스크는 전투화에 매달린 모래주머니 마냥 무겁기만 하다. 숨만 쉬어도 불쾌하고 손가락만 스쳐도 예민해지는 날씨가 이어졌다.


관념적 여름은 시원한 물놀이가 동반되는 역동적인 계절이었는데 숨만 쉬어도 땀이 퐁퐁 솟는 날씨에 사람도 거리도 멈춰져 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기껏 공들인 화장은 외출하자마자 녹아내리기 일쑤에, 반나절만에 맛이 가버린 보리차, 습기 찬 쓰레기통 주변으로 모여든 벌레 집단까지, 곳곳에 자리 잡은 악취는 여름으로부터 등 돌리게 만들었다.


더워서 꼼짝도 하기 싫은데. 조금만 더디게 관심을 주면 끔찍한 형태로 썩어 들어갔다. 나태함을 부르는 동시에 예민한 관리를 필요로 하다니 귀찮은 계절임이 틀림없었다. 특히 나의 적은 바로 높은 '습도'였는데, 하루 한 번 꼴로 세탁기를 돌렸고 다음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축축한 옷가지들이 불쌍한 모양으로 겹겹이 쌓여 있었다.


얼른 겨울이 왔으면. 가을을 넘어서 춥고 폭닥폭닥한 날씨로 이어지길 고대했다. 날씨 탓에 음식이 썩지 않고 등이 흠뻑 젖어 이동하는 출근길이 끝났으면.


그런데 오늘 아침 공기는 달랐다. 찐득한 여름 내음이 물러가고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지난 8월 말에 맞이했던 처서 매직(처서와 마법을 뜻하는 합성어로 처서가 되면 마법처럼 더위가 가신다는 뜻이다)이 드디어 피부 가까이 와닿는 아침이었다.


인간이란 참 예민하고 적응력이 뛰어난 존재인가 보다. 매주 퍼붓는 장마 소식에 짜증이 곤두서다가도, 무려 1시간 동안 레인부츠 쇼핑을 즐기며 장마를 대비했다.


무더운 여름이 물러가고 뒤바뀐 공기를 느끼며 이제는 오지도 않는 겨울을 기대하고 있다. 예전에는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무엇인지 물으면 봄이나 가을을 이야기했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사계절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잠시 머물다가는 이벤트성 날씨가 되었지만 이제는 짧기에 의미 있는 계절이 된 셈이다.

 

여전히 기온은 30도 안팎을 머무르며 여름을 떠나지 않았으니 온전한 가을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벌써 가을맞이 쇼핑에 설레는 사람들은 선풍기를 틀지 않아도 선선한 저녁에 곧 완연한 가을이 다가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는 사계절이 사라진다고 해도 오로지 사계절을 겪어온 한국인들만 느낄 수 있는 주관적인 계절일 것이다.

 

어느 날 눈 뜬 아침 공기로 계절이 바뀜을 느끼고 이에 대한 이야기할 수 있는 주변인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계절이 바뀌면 기분도 한 차례 뒤바뀐다.

 

한국에서 가을을 앞둔 기분 좋은 저녁이었다.

 

 

[이보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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