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2023년의 여름, 두 번의 전시회, 그리고 벙커 [미술/전시]

정여름 개인전: 머나먼 안개 속의 세기, 최나욱 기획전: 방으로 간 도시들
글 입력 2023.09.03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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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여름, 다시 벙커에 가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역량 있는 신진미술인 지원을 취지로 한 <신진미술인 전시 지원 프로그램>을 2008년부터 진행하고 있다. 전시 장소 및 관련 비용을 포함한 지원을 2015까지는 작가 20여 명에게, 2016년부터는 전시 기획자까지 지원 대상을 확대해 운영하고 있다. 신진미술인 지원 전시의 경우 대체로 SeMA 벙커와 SeMA 창고에서 개최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SeMA 벙커가 신진미술인을 위한 장소로 거듭나고 있다는 점은 벙커가 만들어진 첫 이유를 떠올려 보았을 때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정 대상의 신변 보호를 위해 지어졌다고 추측할 뿐인, 아직도 정확히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장소가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미술관으로, 특히 신인 예술인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점은 그 자체만으로 공간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별도의 전시회가 없던 몇 개월간 닫혀있던 벙커는 두 번의 전시를 위해 올해 6월 말 다시 문을 열었다. 올해 6월부터 8월까지, 2023 신진미술인 지원프로그램으로 개최된 두 전시회에 대한 소개 및 감상을 적어본다.

 

 

 

정여름 개인전: 머나먼 안개 속의 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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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적 증인께 - 정여름>

 

 

6월 22일부터 7월 11일까지 개최된 정여름 작가의 개인전은 현실에서 이어지고 끊어낼 수 없는 죽음,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전시장 입구에 놓였던 팜플렛에서는 “머나먼 안개 속의 세기"가 독이나 약처럼 스며들고 좀처럼 절단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세상에는 우리의 시선과 청각에서 인지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면서도 분명하게, 때로는 치명적인 존재로 자리하면서 떼어낼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정여름 작가는 그러한 대상으로 전쟁, 죽음,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작품에 담아냈다.


관객들이 전시장에서 처음 마주하게 된 작품은 “천부적 증인께”이다. 두 개의 스크린, 하나의 헤드폰을 통해 관객은 서로 다른 세 공간의(화자의) 이야기를 보고 듣는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가자 지구의 모습, 평온한 밤이 이어지는 듯하다가 갑자기 폭격을 맞는 도심을 비추며 흔들리는 화면, 그리고 건조한 목소리로 지금까지 접하고 소지한 총기를 나열하는 누군가의 이야기까지, 멀게 느껴지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는 현실의 모습들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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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은행 - 정여름>

 

 

두 번째 작품은 벙커의 가운데에 자리한 조그마한 스크린 속 영상이다. 흑백 화면 속에는 백 달러짜리 미화 지폐들이 불타고 있다. 화면 속 지폐들은 어떤 재앙이나 재난으로 소실되는 것이 아닌, 누군가 고의로 태우는 듯하다. 꼭 망자에게 저승길 노잣돈 하라는 듯 태워지는 돈의 모습을 보면, 왜 원화나 다른 화폐가 아닌 미화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돈을 태우는 행위가 하늘 위의 신을 기리기 위함이 아닌, 이제 저 아래 지하에 머무를 이들을 위한 행위라면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저 아래 묻힌 이들을 위해 현실 세계의 화폐 중 가장 가치가 높은 미화를 태우는 작품의 제목은 “지하은행”이다.


마지막 작품인 “조용한 선박들”은 25분 길이의 영상이다. 선박들 사이에 놓인 강(steel)을 주제로 한 영상에서 정여름 작가는 베트남전 이후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는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강한 재질을 갖추고 무엇이든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강은 어딘가에선 더 이상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로 자리한다.

 

한적한 어느 시골에 자리한 더 이상 날지 않을 비행기처럼, 푼돈에 기념품으로 살 수 있는 훈장의 모습에서 변하지 않을 것처럼 여겨진 무언가 변하게 되는 상황을 정여름 작가는 덤덤히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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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선박들 - 정여름>

 

 

 

최나욱 기획전: 방으로 간 도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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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셔 - 김희천>

 

 

7월 20일부터 8월 11일까지 열린 <방으로 간 도시>들은 최나욱 기획자가 선보인 전시로 하나의 주제를 잇는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흔히 방은 실내 공간 중에서도 어느 한 사람 또는 특정 몇몇 사람들만의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공간이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자리해 왔다.

 

하지만 인터넷의 발달로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물리적 거리를 넘어선 소통이 가능해졌고, 특히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 시대를 거치며 방은 단순히 제한된 사람들만의 공간을 넘어서서 다양한 사람들과의 소통과 경험이 어우러지는 새로운 공간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거쳤다.


전시회의 제목에 맞게 벙커에 자리한 작품들은 한정적인 공간과 개인의 이야기만 담긴 방이 아닌 사회를 담은, 상호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서 더 광범위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다양성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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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차례로 "세수", "마르지 않는 방", "긴 비" - 한선우>

 

 

전시장을 들어서면 큰 스크린에 재생되는 영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메셔”라는 제목의 작품은 서로 다른 방에서 촬영된 영상으로 구성되었으며 어두운 실내에서 촬영해 여러 인물이 각자 다른 방에서 활동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피사체들이 영상에 남기는 흔적”을 가장 큰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는 설명처럼, 영상 속 인물들은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함께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관람객들도 그 안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커다란 스크린을 지나치면 회화 작품 3점이 눈에 들어온다. 자신의 방을 소재로 한 한선우 작가의 작품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공간과 물건이 자리했지만, 독특한 요소들이 더해져 다양하면서도 낯선 분위기를 자아낸다. 각각 다른 모습을 담아낸 세 화폭을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보이는데, 모두 물과 습기가 자리한다는 것이다.

 

그림 속 방안에 자리한 수증기 또는 습기는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에게도 그 축축한 촉감을 전달한다. 관람객들은 그림을 바라보며 시각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촉각의 자극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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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길 걷기 - 최윤>

 

 

막다른 길 걷기는 4개의 화면으로 각자 다른 장소를 보여준다. 어느 화면에서는 360도 촬영 기법의 영상이, 또 다른 화면에서는 어둠 속의 공간을 찍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영상이 이어진다. 네 곳 다 다른 장소지만 잘 살펴보면 화면 속 공간이 모두 전시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영상들은 이동이 자유롭지 못해 실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방문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화생활을 즐길 방안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영상 속의 공간들은 전시장에 실제로 발을 디딜 때의 시선과는 다른 각도로 촬영되어 그 안에 작품과 분위기를 온전히 감상하지 못하게 한다. 뒤틀리거나 포개지는 화면 때문에 영상으로 전시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다는 점은 온라인에서 한 공간을 과연 우리가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지, 그 안에 실은 얼마나 오류가 자리하는지에 대한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


마지막으로 정재경 작가의 코메디아와 도깨비 터라는 영상물이 자리했다. 코메디아에서는 기억을 잃고 놀이공원에서 잠을 깬 인물들이 어렴풋이 들리는 전생의 기억을 뒤로 하고 눈앞의 유희에 집중한다. 도깨비 터에서는 때론 잊혀야 하거나, 현실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과 가치가 담긴 공간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방이라는 공간이 요즘에는 다양한 소통이 이어지는 곳으로 새롭게 정의가 바뀌고 있지만, 여전히 고독과 소통 단절을 의미하는 방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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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메디아 - 정재경>

 

 

 

다시 그 문이 열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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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신진미술인기획전과 하반기에 열릴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개최 장소 중 하나라는 소식 외에는 올해 벙커에서 진행될 다른 전시회 계획은 확인되지 않는다. 전시회의 장소로서, 시민들이 방문하는 문화공간 외에 다른 쓰임은 없다는 듯 다시 벙커는 한동안 문을 닫는다.


장소의 특수성 때문일까. 위에서 소개한 두 전시회의 본질과 벙커라는 장소가 주는 특징이 서로 어우러지는 듯하다.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고찰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세상에 존재했으나 드러나지 않았고 처음 그 목적과는 다르게 변화한 공간에 자리하며 조화를 이룬다. 오랫동안 빛도 사람도 들지 않던 공간은 그렇게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고 새로운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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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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