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취중진담의 낭만 [도서/문학]

가끔은 네가 필요해
글 입력 2023.08.27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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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진담이란 말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말을 아주 싫어했다.


맨정신에 할 수 없는 얘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니까 그런 말은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오랫동안 나의 지론이었다.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그때의 나는 매사에 단정적인 편이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싫고. 모든 것을 나에 맞춰 정의하던 그 치기 어린 습관은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됐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를 정의한 순간, 내가 정한 범위 이상을 술에게 허용하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술의 힘을 빌려 진심을 얘기한다는 것은 허용치 너머의 것이었으므로, 술에 거나하게 취한 뒤에 했던 말들은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곤 했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정의하기에는 지나치게 입체적이었고,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와 함께 술에 대한 생각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는 술을 정말로 좋아하지 않는 것일까? 혹시, 그냥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은 안타깝게도, 내가 술을 꽤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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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움의 이유는 단순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를 만든답시고 술을 마실 수 있는 수많은 순간을 놓쳤던 것이 뼈저리게 아쉬웠던 탓이다.


몇 년짜리 아쉬움을 어떻게든 채워볼 요량으로 여기저기서 술을 마셨다. 주변 사람들이 너 이렇게 술을 좋아했냐며 놀랄 정도로 술 마실 기회라면 놓치지 않았다. 때마침 찾아온 인생의 고비도 한몫해서, 술은 내 생활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술과 과도하게 친해질 즈음, '취중진담'이라는 말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해야 했는데 하지 못한 말,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한 말, 그 외에도 쉽게 정의할 수 없는 말들이 켜켜이 쌓여 내 안에 층을 이룬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에는 그처럼 나도 다 알 수 없는 수많은 꼬리표가 달려 있다.


그들이 술기운이 섞인 입김과 함께 바깥세상으로 나왔을 때, 그들은 정말 무의미한가. 타인에게는 의미 없을지언정, 나 자신은 그들을 보듬어줬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김혼비 작가는 그의 책 [아무튼, 술]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결국 기질 차이인 것 같다. 술이 얹어진 말들을 싫어하는 기질과 술이라도 얹어져 세상 밖으로 나온 말들을 좋아하는 기질. 나는 항상 술을 마시고 꺼내놓았던 말들보다 술 없이 미처 꺼내지 못한 말들을 훨씬 후회스러워 하는 쪽이었다. ...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술은 제2의 따옴표다. 평소에 따옴표 안에 차마 넣지 못한 말들을 넣을 수 있는 따옴표. 누군가에게는 술로만 열리는 마음과 말들이 따로 있다.


흘러가는 시간은 무엇 때문인지 용기를 함께 데리고 가서, 입 밖으로 내는 말보다 삼키는 말이 더욱 많아지고 있음을 실감하곤 한다. 그렇게 아쉬움을 안고 입 안을 맴돌던 말이 술과 함께 나올 수 있다면, 취중진담이라는 것도 상당히 낭만적이다. (물론, '해서는 안 될 말'을 구분하는 지능은 모두가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자.)


그 낭만을 알게 된 이상 술을 멀리하기는 더욱 어렵거늘, 건강검진에서 "술, 적당히 마시면 괜찮겠죠?"라고 물어봤다가 냉정한 대답을 듣고 시무룩해진 나를 보며 생각한다.

 

그 무엇도 쉽게 단정하지 말아야겠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으니.

 

 

[유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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