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너, 나, 우리의 이야기 -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도서/문학]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계속 나아갈 수 있어)
글 입력 2023.08.25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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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작가의 신간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발간되었다. 발간 소식을 모르고 있다가 광화문 역사 걸려있던 홍보물을 보고 그 길로 서점에서 구입해 귀가하는 내내 빠져들어 읽게 되었다. 이번 신간은 책 제목과 동명의 단편을 포함한 7개의 중단편을 담고 있는 모음집이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세 단어로 구성된 짧은 문장의 제목에 매료되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삶을 살아가며 겪는 슬픔과 고통을 다루는 이야기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언제나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으로서,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그 제목만으로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완성되지 않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그 뒤에 생략되어 있는 말은 무엇일지, 작가가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은 나머지 문장은 무엇일지 궁금해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이번 글은 개인적으로 책을 통해 완성한 나머지 문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보려고 한다.



 

사적인, 사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사적이지만 개인적이지는 않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에 등장하는 내가 동경하고 닮고 싶어하는 '그녀', 「몫」의 주인공인 '당신', 「답신」의 '언니'와 같이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로 등장한다. 대명사로 등장하는 인물은 이야기 속의 그녀, 당신 혹은 언니가 책을 읽는 우리 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방식으로 등장인물 간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보편성을 가지며 사회적인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나'와 '그녀'는 용산에서 벌어졌던 아픔을 공유한다. 맥락과 책의 묘사를 고려하면 둘이 공유하는 아픔은 '용산 참사'를 의미한다. 그러나 작가는 구체적인 사건의 이름을 명명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 따라 책에 묘사되는 용산에서 벌어졌던 아픔은 작년 이태원에서 벌어진 가슴 아픈 사건이 될 수도, 또 다른 사건이 될 수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그저 무관심일 뿐이고, 더 나쁘게 말해서 기득권에 대한 능종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말했다.

 

(31쪽)

 

 

이런 방식으로 작품 속에 나오는 그녀의 발언은 더 이상 작품의 '나'에게만 전하는 말이 아니게 된다. 이 책을 읽는 독자, 심지어는 작가 스스로도 본인의 인생과는 다소 먼 사안이라는 이유로 아무 입장없이 흘려보낸 일을 반성하게 한다. 또한 능동적인 순종에서 벗어날 것을 다짐하게 한다.


'내'가 동경하던 그녀가 학계에서 자취를 감추고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가던 내가 하는 생각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스스로의 독백처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의 이름으로 나온 글이나 번역서를 찾을 수 없었다. 구 년 전의 내 눈에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강해 보였던 그녀가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글이나 공부와 무관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때로는 나를 얼어붙게 한다.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머물렀던 흔저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떠나게 된 숱한 사람들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사라질까. 이 질문에 나는 온전한 긍정도, 온전한 부정도 할 수 없다.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43쪽)


 

이 독백 역시 고유명사가 아닌 나라는 대명사가 쓰여 작중의 '나' 뿐 아니라 책을 읽는 수많은 나의 불안을 대신 언어로 설명해준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작가는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미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어떤 병으로 인한 죽음인지 등과 같은 중요하지 않은 정보는 과감히 삭제한다. 작가가 집중하는 것은 그 상황에 놓여 있는 인물이 느끼는 감정과 행동일 뿐이다. 그들의 행동이 옳았는지 아닌지는 지금 이 순간에는 알 수 없다. 사실 시간이 충분히 지난 후에도 옳고 그름은 명확하지 않다. 실제 삶에는 절대적인 선과 악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몫」에는 서로의 의견 차이로 결국 사이가 멀어지게 된 대학 시절 교지 편집부원이었던 '희영'과 '정윤'이 나온다. 사회 구조적인 모순에서 비롯되는 문제에 관심이 많아 주한 미군 기지촌에서 발생한 여성 대상 범죄를 다루고 싶어하던 희영과는 달리 정윤은 실제로 그 모순을 겪는 당사자가 아니라면 아무리 관심을 가진다고 할 지라도 모순의 층위를 모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교지에 실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결국 그 둘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희영이 짧은 생을 마감 할 때까지 서로 어긋나기만 했다.


그러나 작가는 「몫」에서 어긋난 둘의 관계에 주목하지 않는다. 각자 그런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그런 그 둘의 감정과 생각에 집중한다. 


「일 년」에서도 마찬가지다. 세 명 중 한 명만 정직원으로 전환되는 미래가 불안정한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는 '다희'와 회사 내 괴롭힘으로 겉돌던 '나'가 일 년동안 같이 출퇴근을 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공감받고 치유되는 과정에 집중할 뿐, 다희가 그래서 정직원으로 전환이 되었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책의 묘사를 통해 그 당시 다희는 인턴으로 전환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 작가에게 다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다희와 내가 차 안에서 나누던 시간이 나에게, 그리고 다희에게 빛과 같은 시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왜 자신이 팔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곤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다희와 주고 받던 이야기들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 


(123쪽)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 것은 「답신」에서도 이어진다. '내'가 어렸던 언니의 희생과 그로부터 받았던 돌봄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깨달으며 자신이 언니에게 내렸던 판단이 무의미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제 3자의 시선에서 언니의 선택은 옳지 않은 일이지만, 당시 보호 받지 못하는 여자 청소년이었던 언니 앞에 놓여있던 제한된 선택지를 고려한다면 답신의 '나' 그리고 독자는 언니의 선택을 틀렸다고만 단정할 수 없어진다.

 

 

그때 내 마음에서 나는 옳고 언니는 그르고, 나는 맞고 언니는 틀리고, 나는 알고 언니는 모르고, 나는 할 수 있고 언니는 할 수 없고, 나는 용감하고 언니는 비겁하고, 나는 독립적이고 언니는 의존적이고, 나는 떳떳하고 언니는 비굴하고, 나는 배력하고 언니는 이기적이고, 나는 언니를 지켰고 언니는 나를 버렸지. 모든 것이 분명해서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믿었어.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그중 어느 하나도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아.

 

(175쪽)

 

 

또한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실제 삶에는 절대적인 선과 악이 있지 않으며 주제와 하고 싶은 말이 명확한 줄기가 곧은 나무같은 작품 속의 이야기와는 달리 실제 삶은 이리저리 꼬인 여러 나뭇가지의 집합일 뿐이라는 것을.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계속 나아갈 수 있어) 


 

작가는 7개의 단편 내내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는 방식으로 등장인물의 유대를 다룬다. 그러나 그 유대가 대단히 끈끈하진 않다. 오히려 희미하다.

 

'일 년동안 카풀을 하면서 나눴던 대화 (일 년)', '어린 조카가 건네는 투명한 다정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대학교 신입생 때 들었던 글쓰기 수업에서 만났던 강사와의 짧은 만남(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등 그들의 유대는 아주 느슨하고 희미하다. 과거의 스쳐 지나간 한 순간이거나, 머지 않은 미래에 곧 잊혀질 짧은 순간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희미한 유대만으로도 또 한 걸음 나아간다.

 

희미한 유대에서 발견하는 사랑과 서로간의 돌봄은 지나치게 개인주의화된 현 사회에 울림을 준다. 당장 이익이 된다면 나의 이웃에게 혹은 먼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고려하지 않는 선택이 난무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작가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유대와 사랑 그리고 서로간의 돌봄 없이는 해결 될 수 없으며,  문제를 겪어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가치들로 또 하루를 살아내고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작가는 서로 느슨하게 연대하고 사랑하며 서로를 돌보는 사회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 같다. 그리고 나 또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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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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