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대안적인 시선 속 재발견 -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

영상예술과 영화의 차이
글 입력 2023.08.2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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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공식포스터1.jpg

 

  

영화와 전시를 동시에 즐기는 국내 유일의 탈장르 영상예술축제이자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대안 영화제인 네마프(Nemaf)가 개최되었다. 다원예술 형식의 영화영상 장르 작품을 상영하고 전시하는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내가 관람한 섹션은 8월 13일 [한국 4: 중첩]이었다. [중첩] 섹션은 <고고한 그 사랑>,  <빛 속으로>,  <유령극>,  <음각> 총 네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흥미로운 제목들을 보고 무언가에 홀린 듯 예매했다.

 

실험영화를 본 경험이 거의 없는 나에게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대안적인 시선을 제시하는 네마프의 취지처럼, 스토리를 따라가며 이해하기보다는 영상이 주는 하나의 이미지나 주관적인 경험과 관련지어 해석했다. 또한 전체적인 맥락보다는 소재, 배우의 말투, 카메라 무빙 등 영상의 디테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쉽게도 마지막 작품 <음각>은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당일 상영되지 못했다. 해당 섹션이 아닌 다른 영상이 흘러나와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미리 꼼꼼하게 체크했다면 관람 경험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럼에도 기분 좋게 영화관을 나올 수 있었던 나머지 세 작품을 소개한다.

 

 

 

한국4: 중첩


 

<고고한 그 사랑> - 명의 생일날, 납은 명에게 명이나물을 먹여주던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1억 5천만 년 전에 묻고 온다. 명을 만난 납은 주황색 삽을 건넨다. 따로, 또 같이 하루를 보낸 두 사람은 텅 빈 경기장에서 명이나물을 먹여주는 납의 손가락 화석을 함께 발굴한다.

 

명과 납이 하루를 보내며 나눈 대화가 흥미롭다. 뭉게진 듯한 말소리에 파편적인 대화 내용은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맛있다” 같이 몇 개의 단어만 들릴 뿐이다.

 

자연스레 대화의 형식에 집중하게 된다. 호응하는 말들이 만드는 독특한 리듬감은 하나의 음악같다.


<빛 속으로> - 주로 사진으로 구성된 빛에 관한 영상이다. 중고 상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사진을 재촬영한 등대 사진 수집가의 자료, 식민지 시절 부산과 만주 봉천을 연결했던 히카리호, 부산에서 일본의 지바현으로 연결되는 해저 광케이블 등 다른 이들이 촬영한 사진들을 통해 부산과 일본을 연결한다.

 

사진은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남기는 동시에 절대 현재가 될 수 없는 시간 속 공간을 바라보게 한다. 그 사진의 특징을 통해 다른 시간의 지층에 있는 같은 장소를 상상하게 된다.

 

<유령극> - 초등학생 이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동네 극장을 방문한다. 매일 같은 작품만 상영하는 허름한 극장에서 둘은 플래시백 기법을 활용한 영화를 관람한다.

 

영화적 문법을 모르는 노인은 플래시백을 어떻게 이해할까? 같은 장면이 재등장하며 아련한 기억의 회상을 보여주는 플래시백에 대한 다른 시선의 이야기.

 

영화를 보는 경험은 재연될 수 없다. 그러나 보는 이에 따라 보는 때에 따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영화의 가능성을 영화 속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세 작품을 아우르는 공통 주제 ‘중첩’은 시간의 중첩을 의미한다. 각 작품들은 복합적인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사운드의 형식, 빛의 특성, 플래시백을 활용해 영화적 구성요소나 문법에 대해 관객이 다시 한번 사유해 볼 시간을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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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인 시선에서, ‘중첩’이라는 주제를 제외하고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고고한 그 사랑’은 SF, ‘빛 속으로’는 사진 프로젝션, 유령극은 실험이라는 장르로 표기되어 있지만 나의 시선에서는 모두 서사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실험영화처럼 느껴졌다.

 

네마프는 영화제가 아니라 ‘영상예술’을 다루는 페스티벌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이들에게 감독이라는 칭호 대신 ‘작가’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영화제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며 감독 대신 작가라는 칭호를 사용할까? 문득 영화와 영상예술의 경계가 궁금해진다.

 

 

 

영상예술은 영화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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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적 의도와 예술적인 의도가 복합적으로 뒤섞인 영화라는 매체는 명확하게 정의 내리기가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상업영화를 순수한 예술적 의도에서 내가 만들고 싶어서 만들었다면 그건 실험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느슨한 내러티브를 통해 영화의 본질을 탐구하는 누벨바그는 일반적인 영화라고 볼 수 있을까?

 

쉽게 정답을 말할 수 없는 질문들이 쏟아진다. 먼저 영화와 실험영화의 경계선을 찾아보자.

 

주로 영화라고 부르는 영상들(이하 ‘영화’라고 칭하겠다)은 대개 스토리, 예술성, 관객과의 소통을 중시한다. 그러나 예술영화를 아우르는 실험영화는 기존의 영화의 서사성을 거부하는 대신, 매체 그 자체에 대한 탐구나 창작자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한다. 즉, 둘은 내러티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갈라진다.

 

내러티브란 광의에서 본다면 “사건의 일련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쇼트와 쇼트의 연결을 최소단위로 다루는 영화에서 내러티브는 필수 조건이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영화 내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캐릭터에 초점을 두면서 촘촘한 내러티브를 구축하지만, 실험영화는 내러티브의 내적 구축보다는 내러티브 그 자체의 형식이나 기법에 집중한다.

 

영화의 범주를 영화 내에서 발생하는 사건까지만 한정한다면 영화는 촘촘히 짜인 내러티브를 지녀야 한다. 하지만 내러티브의 형식을 주로 다루며 느슨한 내러티브를 지닌 영화까지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정답은 없다. 영화의 범주를 어디까지 정하느냐는 온전히 정의하는 이의 가치관에 달렸다. 나는 영화의 형식을 다루는 영상들도 영화라고 생각한다.

 

요약하자면 영화의 범주는 내러티브를 각자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촘촘히 짜인 내러티브를 가진 영화만이 영화라고 보는 관점에서는 실험영화는 영화가 아니라 영상예술이지만 사건의 일련의 흐름이 존재하는 것까지 내러티브로 인정한다면 ’영화에 관한 영상‘들 중 대다수는 일반적인 영화에 포함될 것이다.

 

문제는 중심이 영화의 안과 밖 중 무게 추가 어디로 기울었는지, 어떻게 분류할지 그 경계가 애매한 작품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한국 중첩 4]의 <유령극>이라는 작품이 그러하다. ‘노인이 바라보는 플래시백’에 대해서 사유하길 바라지만 동시에 짜임새 있는 내러티브를 보여준다.

 

또다시 질문이 이어진다. 내러티브의 무게 추를 양적 차이가 아니라 비중의 차이로 잴 때, 어디까지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에 대한 대안적인 시선은 나에게 당연하게 믿어왔던 것들을 고민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낯선 고민속에서 본질적 시선과 대안적 시선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영화에 대한 사유가 지속되기를 소망해본다.

 

 

[유다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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