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둡고 견고한 침묵의 벽, 그리고 붉은 균열 – 베르나르다 알바 [공연]

글 입력 2023.07.23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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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다 알바> 초연을 관람했던 날이 떠오른다. 작은 무대의 삼면을 둘러싼 객석, 그중 1열의 좌석에서 나는 열 명의 여성 배우들이 발산하는 폭발적인 에너지에 말 그대로 압도당했다.


남편을 잃고 집의 주인이 된 베르나르다가 그녀가 다섯 딸에게 행하는 억압과 통제는 숨이 막힐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정열적인 플라멩코 안무가 이에 대항하듯이 펼쳐지며 작품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겉으로는 평온하고 고요해 보이지만, 극도의 통제 속에서 다섯 딸들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서로 시기와 갈등을 겪게 되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처음 공연을 봤을 때의 충격도 잊히지 않지만, 초연과 재연을 지나 이번 삼연에 이르기까지 몇 번을 봐도 여전히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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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다는 가부장적인 사회적 관습과 이웃들의 시선에 심하게 집착하며 딸들이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감시한다. 자신이 그동안 겪은 상처와 폭력으로부터 딸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엄격한 통제로 이어진 것이다. 


그녀도 어린 시절에, 그리고 결혼하던 날에 꿈꾸던 것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모두 무너져내렸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집이 된 이 공간을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침묵의 벽으로 쌓아 올리려 한다. 베르나르다의 두 번째 남편 안토니오의 8년상을 치르는 동안 그렇게 그녀의 집은 감옥과 같은 공간으로 변한다.


순결을 향한 그녀의 과도한 집착은 비정상적으로 보이지만 아직도 숨이 턱 막히는 사회적 인식들이 남아있기에 낯설지는 않다. 안전함과 평온함을 지키기 위해서 감추고 침묵하도록 강요받는 것은 더더욱 익숙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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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즌에서 순백의 거대하고 견고한 벽체 대신 콘크리트로 베르나르다의 집을 형상화한 것은 작품의 배경인 1930년대 초의 구조적 억압과 제약을 현대의 시각으로 해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시간이 흘러 균열이 일어나 부서진 벽과 밖으로 드러난 철근이 나타내듯이 사회적 의식 변화에 따라 억압과 차별도 허물어져 가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아직도 이 콘크리트는 굳건하고 거대한 벽체의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베르나르다 역시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그것을 반복하는 가해자가 되는 모순적인 상황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 작품에서 절대적인 권위자로 등장한다 하여 납작하게 이 인물만을 비난하는 것은 불합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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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다의 다섯 딸 앙구스티아스, 막달레나, 아멜리아, 마르띠리오, 아델라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 집에서 살아간다.


도망가기를 꿈꾸거나,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맞서 싸우거나.


막달레나의 노래를 시작으로 다섯 딸들이 사랑에 대한 각자의 감정을 담은 솔로 테마 넘버를 연달아 부르고, 이를 다 같이 토해내듯 5중창을 하는 파트는 단연 작품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 속 모든 인물의 개성과 서사, 관계성을 소중히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언제나 가장 눈이 가게 되는 인물은 베르나르다의 막내딸인 아델라다. 


극 전체의 정체성을 응축하여 담아낸 강렬한 ‘프롤로그’에서부터 그녀가 작품에서 어떤 존재인지가 드러나는데, 베르나르다의 폭력에 그대로 당하며 시선을 피하는 다른 딸들과 달리 아델라는 유일하게 그녀의 손을 막아서면서 당차게 자신의 이름을 외치기 때문이다. 


극도로 절제된 삶을 강요하며 딸들을 남성들로부터 단속하려는 베르나르다에게 ‘낮잠만 자거나, 부끄럼이 많거나, 혹은 남자들이 다 싫어하는’ 딸들은 큰 걱정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어리고 가장 예쁜’ 막내 아델라는 자신이 선택한 사랑과 함께 젊음을 불태우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나는 언제나 그녀가 불꽃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꽃이 아닌 불꽃처럼 살고 싶어 하는 영혼. 자유와 본능을 가장 강하게 추구하며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기만의 방으로 향하는 존재.


요즘 들어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자유로워지는 것뿐이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자주 아델라라는 인물의 눈빛와 몸짓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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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단순히 사랑 때문에 갈등을 겪는 자매들을 그린 이야기가 아니다. 


자연히 피어오르는 사랑과 호기심 같은 감정조차 통제되는 삶 속에서 그녀들이 자아실현과 같은 더 큰 야망을 가지는 일이 쉬웠을 리 없다. 다섯 딸들이 모두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은 여성들이 꿈꾸는 최상의 것이 오직 사랑과 결혼일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상이 어땠을지 짐작게 한다.


사랑을 향한 그들의 울부짖음은 단순히 사랑에 목을 매는 여인들의 목소리가 아니고, 그 어떤 것도 스스로 결정하고 얻을 수 없는 그들의 처지와 무력감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심하게 통제받는 부분을 오히려 가장 원하게 되며 충돌이 일어나고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본능에 대한 억압이 얼마나 큰 비극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연스러운 시기와 갈등까지 지워버린 채 평화를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에 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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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부터 꾸준히 봐온 작품인 만큼 시간이 갈수록 작품에 더 큰 애정을 느끼게 된다. 이전 시즌의 배우들과 무대 연출을 다시 볼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이 존재하지만, 정영주 예술감독의 말처럼 어쩌면 늘 같아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좋았던 기억은 간직하고 앞으로의 새로운 시도와 변화도 응원하고 싶다.


무엇보다 이 작품 자체가 가진 강렬한 정체성과 가치를 믿기에, 더 다양한 창작진과 배우들이 만들어낼 시너지 역시 기대되는 작품이다.

 

 

 

송진희 컬쳐리스트.jpg

 

 

[송진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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