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일은 뭘 싸갈까? [음식]

직장인이여, 도시락을 싸라
글 입력 2023.07.23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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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면 아침부터 감사하게도 엄마가 한입에 넣기 좋은 김밥, 유부초밥을 싸고 소시지를 볶아 주었다. 그래서 내 인생에서 도시락은 어디 놀러 갈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평소에 먹을 수 없는 음식들로 채운 특별식. 그렇다 보니 만화에서 나오는 도시락을 동경하곤 했다.

 

눌러 담은 집에서 한 밥, 평범하지만 도시락용으로 만든 듯한 반찬. 도시락을 먹는 사람에 맞춰 꾸민 아기자기한 모양새. 두 도시락을 놓고 보면 들어가는 정성은 다를 게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화 속 도시락은 정말 '식사'를 위한 음식처럼 보였고, 내 도시락은 '이벤트'용 음식 같았다. 그래서 언젠가 저것처럼 식사를 위한, 한껏 꾸민 아기자기한 도시락을 먹고 싶다는 철없는 생각을 했었다. 도시락을 싸 다니는 지금, 세 번 생각해 보아도 철이 없는 생각이었다.

 

 

 

도시락통 정하기


 

회사에 입사하고, 나는 나의 철없는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공유 오피스다 보니 따로 구내식당이 없어 사 먹거나 싸 오거나 둘 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초, 중, 고등학교에 다니며 봤던 식판을 대학생이 되자 더 이상 보기 싫었다. 대학가라 싸기도 하고 종류도 다양해서 알바한 돈을 거의 밥을 먹는 데 썼다. 기왕이면 세끼를 다른 걸 먹고 싶었고, 어제 먹은 걸 오늘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랬던 나인데.

 

나는 도시락을 싸기로 했다. 이유는 당연하다. 서울의 물가를 감당하기엔 상경한 사회초년생의 지갑은 한 없이 가볍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락통을 사기로 했다.


도시락통 종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했다. 만화에서 보던 나무 도시락통, 어릴 때 쓰던 도시락통, 철, 스테인리스, 플라스틱,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소재 등 크기도 소재도 색깔도 천차만별이었다. 그뿐인가, 어떤 것은 수저통을 사은품으로 줬고 어떤 것은 아예 식기가 들어가는 홈이 파여 있었다. 도시락 가방을 주기도 하고, 반찬 나누는 칸막이를 주기도 했다. 가볍게 생각하고 사이트를 들어갔던 나의 동공을 면접 합격 전화를 받았을 때보다 더 떨렸다. 무엇을 사야 멋진 도시락통을 샀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


우선 가장 동경하던 나무 도시락과 캐릭터 도시락을 제외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보온이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크기가 작았다. 스테인리스도 제외했다. 쇠 긁히는 소리도 싫었고, 은근하게 올라오는 금속 냄새도 맡고 싶지 않았다. 그랬더니 플라스틱과 신소재 도시락만 남았다. 둘도 비슷했지만, 지푸라기가 들어갔다는 친환경소재 도시락통으로 결정했다. 크기가 컸고 전자레인지에 넣어도 안전하며 보온 가방도 줬다. 무엇보다 수저 들어가는 홈이 따로 있었다. 어지간하지 않으면 수저를 잊어 손으로 퍼먹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혹, 이 글을 읽고 도시락을 생각해 보는 분이라면 꼭 전자레인지 가능 여부와, 수저 수납, 크기를 고려해서 장만하는 것을 추천한다.

 

 

내꺼 도시락토.jpg

 예뻐서 사는 건 더 예쁜 거 발견한 순간 끝나지만

기능이 좋으면 계속 쓰게 된다. 필요에 맞춰서 잘 골라 사자.

 

 

 

반찬은 뭘 싸지?


 

도시락통을 샀으니 이제 내용물을 채워야 한다. 로망이었던 아기자기한 도시락이 싸고 싶었다. 곰돌이 유부초밥. 꼬치에 끼운 베이컨 롤. 하지만 내 환상은 유부초밥을 만들다 박살났다. 추억은 기억의 미화라는 것을. 서툰 실력으로 고작 12개를 빚었는데 30분이 사라졌다. 다시 한번 엄마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끓어오르는 순간이었다.

 

김밥은 더 총체적 난국이다. 적어도 들어가는 재료가 5가지. 마트에 가보면 김밥 재료는 대부분 대용량이다. 나는 한 끼에 두 줄 먹는데 남은 재료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세 끼로 부족하여 나흘은 김밥만 먹어야 할 수도 있다. 다시 한번 추억은 기억의 미화라는 걸 깨닫고 만다. 유튜브 속 캐릭터 도시락? 그걸 내 실력으로 만들려면 진짜 새벽 4시 기상을 해야 하는데, 직장인이 어떻게 4시에 일어나서 자기 도시락을 쌀 수 있냐는 말이다.

 

각 잡고 예쁘게 싸 보려고 한 날도 있지만, 아뿔싸. 양이 모자랐다. 오후 내내 꼬르륵거리는 배를 붙잡고 물을 밀어 넣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만화 속 주인공들이 밥에 밥반찬을 싸는 이유가 다 있었다. 그게 제일 빨랐다. 반찬 몇 가지만 준비해 두면 아침에 밥만 해서 담기만 하면 된다. 맨날 먹는 거다 보니 양 조절도 쉽다. 남은 건 아침으로 먹을 수도 있다. 최고다. 세 끼를 모두 다르게 먹는다는 건 정말 정말 힘든 일이었구나, 한 번 더 엄마에 대한 사랑을 외쳐본다.


유튜브처럼 예쁘게 꾸미기에는 시간도 없고 낭만도 없어서 말이다. 그래도 한 끼라도 맛있게 먹었으면 해서 도시락용 반찬을 만들곤 한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조금은 특별하게. 김치는 볶음김치로, 주먹밥은 기왕이면 다른 속 재료를 넣어서, 남은 채소를 냅다 썰어 라따뚜이를 끓이고, 그라탱을 한다면 치즈를 미리 녹여 냉장 보관한 후 회사에서 전자레인지로 돌려먹는 식이다. 그래도 남들이 걱정하는 만큼 도시락 싸는 게 힘들지는 않다. 도시락 싸기가 재미있다. 내 도시락을 보는 회사 사람들의 반응도 재밌고, 성공해서 맛있게 먹는 것도 즐겁다. 그래서 매일 즐거운 고민의 연속이다. 내일은 뭘 싸갈까?

 

 

재료.jpg

 

 

도시락은 생각보다 장점이 많았다. 기왕이면 갓 지은 밥으로 도시락이 싸고 싶어 아침 일찍 일어나다 보니, 부지런하게 사는 기분이 물씬 든다. 집에 들어가면 잘 나오지 않는데 장 보러 마트에 가면서 산책도 한다. 식비도 사 먹는 비용에 비해서는 제법 저렴하다. 한 가지만 하기에는 질리니 두세 가지씩 반찬을 만들다 보면 눈대중만으로 슉하고 후다닥 만들게 된다. 할 수 있는 게 점점 늘어나고 이렇게 하나하나 쌓이다 보면 성취감이 장난 아니다. 내가 열심히 사는 기분. 나는 잘살고 있구나. 머지않은 미래에 더 이상 사회 초년생이라고 할 수 없는 경력이 쌓여도 지금같이 바지런 떨고 있기를 바라본다.

 

 

[빈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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