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살 : 아픔이나 괴로움 따위를 거짓으로 꾸미거나 실제보다 보태어서 나타냄.
엄살에 관한 정의를 보고 두 가지 물음이 피어오른다. 하나는 아픔이나 괴로움을 축소하거나 부풀리지 않은 채 느끼고 전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냐는 경외 섞인 물음. 또 하나는 타자의 아픔과 괴로움을 거짓과 과장으로 확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냐는 푸념 섞인 물음이다. 나의 세상에선 두 가지 모두 성립할 수 없는 상태로서 아픔과 괴로움을 나누는 진술은 필연적으로 엄살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 생각하자면 ‘엄살’이라는 단어가 아픔과 괴로움이 갖는 여러 면모 중 특히 부정적인 측면을 확대한 불균형한 언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고통이란 감각에 관심을 갖기란 그 자체로 유쾌하지만은 않지만, 왠지 엄살이라는 인상 앞에선 더욱 성가신 것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엄살을 목격하는 입장에서도, 엄살을 피우는 입장에서도.
귀찮게 하지 말자는, 민폐 끼치지 말자는, 굳이 힘들어지지 말자는 생각에 숱한 엄살들은 언어가 되지 못한다. 그렇게 나와 다른 이가 편안해졌다면 별다른 첨언이 필요하지 않겠으나 안타깝게도 그런 깔끔한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아무래도 엄살을 부리지 않고서는 살아가기 힘든 게 인간이 아닌가 하는 거대한 상상을 하게 된다.
나는 엄살을 적극적으로 듣고 싶어 하는 부류다. 정확히는 엄살을 마구 피우고 싶기에 누군가의 엄살이 필요하다. “엄살을 부린다는 게 훨씬 더 에너지를 쓰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염치없게 타자의 엄살을 적극적으로 원하고 수집한다. 나는 나에게 엄살을 부린 이에게 그것의 100분의 1 정도만큼 나의 것을 되돌려 줄 수 있는 작자이기 때문이다. 염치든, 성격이든, 팔자든 무슨 이유에서건 내 엄살의 연료는 엄살이다.
“한 번에 한 분의 손님을 초대해 비건 만찬을 차려드려요. 대신 손님께선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식탁을 사이에 두고 당신과 나눈 대화를 기록하고 싶습니다.” - 담 -
<밥만 먹여 돌려보내는 엉터리 의원, 엄살원>은 엄살을 엄살의 연료로 태우는 이들의 이야기가 가득한 대화 모음집이다. 엄살원의 주인 안담은 이야기를 지불하라고 했는데, 식당과 의원 사이 어딘가의 기능을 하는 엄살원의 이름처럼 특히 엄살을 피우는 이야기가 높은 화폐 가치를 갖는 듯했다.
엄살원의 운영진과 손님은 모두 ‘크고 작은 활동가’다.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직원들’부터 시작해서 홈리스, 성노동자, 불법 촬영물, 동물권, 기후위기, 그것들과 굵고도 미세하게 연결된 존재를 위해 자기 몸을 적극 활용하고 소모하는 이들이다.
짧은 소개만으로 듣는 이의 숨을 트이게 만들거나 꽉 틀어막을 수 있는 양극단의 힘을 가진 이들이기도 하다. 엄살은커녕 수차례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아니 오히려 피를 제물 삼아 광폭해질 것만 같은 활동가들이 엄살원에 발을 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 당연하게 그들 역시도 엄살을 피워야 하는 인간 종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누구보다 엄살이 필요한 여린 ‘손’의 소유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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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상상하는 것은 그런 타자가 나와 같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데서 가능하다고 믿는다. 상상이란 대개 완전한 창조가 아닌 약간의 변형에서 더 활발히 이뤄진다. 타자에 대한 상상이 점점 자리를 잃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한 남이 사실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작은 인식이 부족한 탓이 아닐까. 엄살원의 식구들은 그중에서도 상상의 가능성을 가장 많이 박탈당한 대상일 것이다. 그들은 정의를 수호하는 천사가 되거나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악마가 된다.
엄살원은 절대적인 선과 악이라는 허황된 거짓 사이를 잇는 가교가 되어 강하고도 여린 활동가들이 발 디딜 수 있는 실재를 만든다. 우리가 존재하고 연결되어야 할 오해와 진실 사이의 공간이기도 하다.
너무나 제멋대로인 이들은 밥을 먹는다는 공통의 감각으로 식탁 앞에 소환된다. 정성과 맛으로 쌓아 올린 음식의 온기 속에 주인장들은 손님의 빛나는 면모를 언급한다. 그들이 수행했고 수행할 행적들이 정작 스스로는 다 알 수 없을 만큼 대단하고 아름다움을 정성들여 설명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손님은 빛과 함께 드리워진 자신의 어두운 ‘빈틈’을 그에 대한 답으로 제시한다. 편리를 위해 고기를 먹은 날들, 어떤 존재와 이상보다 자기감정을 우선했던 날들, 옳은 신념을 지킨다는 윤리적 우월감에 고취된 날들, 싸워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말을 뱉어낸 날들, 악을 쓰고 지키고자 하는 과정이 동시에 너무 버겁기도 한 날들.
활동가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취약함’을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자기 신념과 능력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치기 쉽기에 엄살은 금기와도 같아 보인다. 단단한 금기는 그들의 대화 속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엄살 속에서 더욱 풍부해지고 강해지는 언어를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힘껏 부푼 틈을 비집고 빈틈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그 자체로 포기와 항복이 아닌 찢어진 근육을 봉합해서 더 튼튼한 근육을 만들겠다는 의지에 가깝다고 느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마력의 치유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이 책은 오히려 마음껏 오해하기를 장려하는 것 같다. 그 빈틈을 약점과 모순이라고 보지 않는 이에게 오해는 오해로만 남지 않으니까. 사랑은 그런 오해 속에서 싹트기도 하니까. 오해라는 불균형한 관심일지라도 반드시 그것이 필요한 존재도 있으니까.
그들의 언어는 완성되지 않은 공백이 있다. 정확히는 미완의 자리를 내어준다. 그것이 서로를 길고도 세심히 바라볼 수 있는 조건임을 알고 있듯이 말이다. 그렇게 실수할 수 있는 공간과 여유를 만들 때 숨 쉴 수 있고, 이내 더욱 단단해질 수 있다는 진리를 그들의 대화 속에서 명확히 목격할 수 있다.
눈으로 울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울었다. 마음에 응어리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녹아내리면서 흐른 눈물이라고 느꼈다. 나를, 동료 친구를, 막연한 세상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이런 대화는 결국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든다고 나는 느꼈다.
대화의 한계와 상상력을 확장하는 엄살원의 이야기를 계속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