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붉은 억압의 세계, 검게 물든 욕망 - 베르나르다 알바

베르나르다 알바, 색을 통해 극을 돌아본다
글 입력 2023.07.1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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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수의와 검은 상복의 대비를 떠올려 본다.


떠난 이가 입는 하얀 옷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색이다. 남은 미련도, 욕망도 당사자에게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는, 그저 '무'를 의미하는 색. 하지만 남은 이가 입는 검은 상복은 어떤가. 모든 색이 뒤섞여서 마지막으로 만들어지는 검정. 떠난 이가 남긴 미련에, 남은 이가 가진 욕망까지 모두 섞여 버린 '혼돈'의 색이다.


베르나르다 알바가 장례식 후 가족들에게 8년간 입기를 강요하는 검은 옷은 이 지점에서 모순을 지닌다. 모든 욕망이 억압된 공간에서 욕망으로 가득찬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은 그 시작부터 갈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베르나르다는 철저하게 권위를 앞세워 집안을 통제하려 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고요함으로, 그 안에서 구성원들이 무엇을 느끼고 어떤 걸 원하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가 존재하는 그 공간이, 그가 보기에 평화로우면 그만이다.

 

 

[꾸미기][크기변환]2023 베르나르다 알바 보도용 (1).jpg

 

 

이 부분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색은 '빨강'이다.


무대의 정면에 위치한 문이 열릴 때마다 눈이 아프도록 붉은 빛이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이 색에서 연상되는 것은 'STOP', 즉 '경고'의 의미다. 멈추어라, 그만두어라,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라. 강요된 침묵이며, 조작된 평화다.


이는 불가피하게 반작용을 불러일으킨다.


반작용의 시작은 막내 아델라의 '초록' 드레스다. 다른 언니는 그 드레스를 검은색으로 물들이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얘기하지만, 아델라는 굴하지 않는다.

 

절제해야만 하는 생활을 거부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아델라가 무대의 문을 열었을 때, 그 문에서 발산되는 색은 빨강이 아닌 초록이다. 생명력의 상징인 초록이 아델라를 눈부시게 비춘다. 고사(枯死)되어 가는 집에서 홀로 생명의 색을 지녔다는 것부터가 비극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자신의 통제 하에 있다고 믿고 있는 베르나르다는 갈등의 불씨가 보여도 눈을 감고 무시한다. 마르띠리오의 침대 시트 사이에 있던 사진, 언니의 약혼자이자 동생의 연인인 뻬뻬의 사진은 '장난'이었다는 허술한 변명으로 무마된다. 자신만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이기적인 선택이다.


그 불씨를 무시한 결과를 보여주는 것처럼, 연출된 평화가 무너지는 순간은 마르띠리오의 처절한 절규로 시작된다. 절제해야 했던, 절제하고 싶었던, 하지만 그러지 못했던 욕망은 무대를 가득 채우는 목소리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절규는 아델라의 앞에 놓인 문을 붉은색으로 물들인다. 더 이상 그 앞에 생명의 초록색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극의 원인이 된 욕망은 얕게 보면 한 남자를 둘러싼 치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대, 결혼 없이, 남자 없이는 사회적인 생활마저 어려웠던 여자들의 세상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단순히 남자가 아닌 '자유'에 대한 근본적 욕망으로도 치환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꾸미기][크기변환]2023 베르나르다 알바 보도용 (2).jpg

 

 

이 극을 읽는 하나의 요소로 '색'을 이야기하긴 했지만, 색 외의 다양한 요소로도 이 극은 억압과 자유를 대비시킨다. 어둡고 무거운 옷, 그 옷을 입고 추는 자유의 춤 플라멩코. 굳게 닫힌 문과 곧게 세워진 벽, 하지만 조금 생겨난 틈 속으로 들어오는 빛. 이 모든 대비가 극의 메시지를 강화한다.


강요된 침묵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사람의 욕망이란 무엇일지, 더 나아가 '나'의 욕망은 무엇일지. 내 마음속의 문을 열면 어떤 색을 만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게 만드는 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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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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