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무지에서 기인한 자긍심은 존재할 수 없다 [문화 전반]

퀴어 퍼레이드의 한복판에서 '노 프라이드'를 생각하다
글 입력 2023.07.26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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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퀴어퍼레이드를 방문했다.

 

퀴어퍼레이드, 일명 퀴퍼가 서울 시청 앞 광장 자리를 빼앗겼다는 소식은 전주국제영화제 스태프를 할 때 들었다. 모두가 즐기는 축제의 한가운데에서 누군가 갑자기 나의 목덜미를 잡고 쑥 떼어둔 기분이었다. ‘너는 여기에 속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듯한, 그런 소식이었다. 슬펐다. 그 뒤로 나는 서울 시청 앞 서울광장에 방문한 적이 없다.

 

한 가지 씁쓸했던 것은, 내가 아주 슬퍼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퀴어를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 아주 새롭고 놀라운 소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씁쓸하되 극심히 절망하진 않았다. 존재를 사방팔방 알리며 온다고 하여도 그게 불행이 아니게 되지는 않지만, 너무 잦은 불행은 때때로 평범한 일상이 된다. 또 하나의 장소를 빼앗겼구나, 언제 되찾을 수 있을까. 덤덤히 퀴어퍼레이드 날짜를 다시 확인할 뿐이다.

 

* 7월 1일, 서울광장에서 '청소년·청년 회복 콘서트'가 열렸다. 퀴어퍼레이드는 을지로 일대에서 열렸다.


 

 

6색의 자긍심 깃발과 노 프라이드


 

7월 1일은 정말이지 미친 듯이 더웠다. 나와 친구는 카페만 두 번을 갔다. 안 그래도 열기가 몰려 무더운 도심인데, 사람이 넘치도록 가득 차니 아주 그냥 찜통이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더위였다. 다음 행사는 제발 좀 더 넓은 장소, 시원한 장소에서 했으면 좋겠다. 마음대로 될 리가 없지만 말이다.

 

두 번째로 간 카페에서 친구는 어딘지 모르게 오늘 하루가 슬펐다고 했다. 대화를 이어 나가고 집에 돌아오면서까지 친구의 그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어땠지?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울부짖는 혐오 세력과 마주하며, 혐오 세력과 유쾌하게 사진을 찍고 지나가는 퀴어퍼레이드 참가자를 바라보며 어떤 감정을 느꼈지?

 

내 감정을 정의하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와닿게 느낄 정도로 큰 폭의 감정이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내가 느꼈던 건 약간의 씁쓸함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행사 초반에 알게 된 ‘노 프라이드’의 존재 때문일 수도, 이미 느끼고 있던 배제 때문일 수도 있겠지.

 

퀴어퍼레이드는 ‘자긍심 깃발’을 휘날린다. 6색의 무지개 깃발은 온 퀴어의 자긍심, 프라이드를 상징한다. 모두가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라 외치는 행진에서조차 ‘속하지 못한 자들’이 있다는 건 씁쓸함을 넘어 슬픈 일이다. 내가 어딘가 잔잔했던 건, 눈부신 연대 뒤에 또 소외된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잊히지 않아서이다.

 

노 프라이드는 *‘프라이드’가 부끄럽게 여기는 불법 존재들의 파티다. 노 프라이드의 주최자, 참여자들은 자신들을 ‘퀴어 망명자들’이라고 정의한다.

 

*존재 자체가 불법인 비국민, 이주노동자, 홈리스, 성병캐리어, 각종 정신병자, 장애인, 노출광, 약물 사용자, 복장전환자, 성중독자들을 포함하는 각계 각층의 퀴어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기조문은 *‘정상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긍심을 갖는 것’을 거부당했고, 스스로 거부한다. 생각해 보면 인사말에 명시된 이들은 대부분 ‘모든 퀴어가 그렇지는 않다’라는 말로 배제되는 이들이다. 불법의 존재들이다. 정상 사회에, 법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이 모든 말들의 이전에, 동등한 인격의 사람이다. 7월 1일의 나는 그걸 잊지 않기로 다짐했다.

 

*출처: 노 프라이드 2023 기조문.

 

 

노 프라이드 기조문 이미지.jpg

출처: 노 프라이드 2023 기조문

 

 

 

양극화와 퀴어


 

양극화,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서로 점점 더 달라지고 멀어짐’을 뜻하는 이 현상은 사회 속으로 아주 빠르게 스며들고 있다. 퀴어 집단도 그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노 프라이드의 등장이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갈등을 딛고 같은 ‘퀴어 프라이드’의 이름으로 연대하던 이들의 갈라섬은 개인의 발언권이 강해졌다는 뜻이지만, 결국 견해의 차이와 차별의 정도가 심해졌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노 프라이드의 기조문과 여러 단체의 참여 선언문을 읽으며 초등학생 시절 했던 콩 거르기 실험이 생각났다. 가장 성긴 체에 알이 큰 강낭콩을 거르고, 그다음으로 성긴 체에 검은콩을 거르고, 더 촘촘한 체를 사용해 얇은 쌀알들을 걸러낸 다음 마침내 맨 밑층에 모래를 남기는 실험이다. 거르기 전에는 한데 뭉쳐 찾아볼 수도 없었던 모래알들이 체를 설치하고 나면 맨 밑으로 툭툭 떨어지는 게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왜 우리 사회는 이 작은 실험과 이리도 닮았을까. 왜 자꾸 누군가는 쌀이, 누군가는 모래가 되어야 하는 걸까? 같이 뭉쳐서 진득한 밥이 될 수는 없는 걸까. 아직은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을 애써 해석해 가며, 처음 마주하는 성노동자해방운동 주홍빛연대 차차와 한국농인 LGBT의 참여 선언문을 생경한 낯으로 읽어내리며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다.

 

 

 

다시 함께할 날까지


 

앞으로의 퀴어퍼레이드를 무거운 마음으로 함께할 것 같다. 서울퀴어문화축제에는 아직도 몇몇 윤리적인 쟁점이 있고, 이에 반발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다. 지금과 같은 퀴어 커뮤니티를 거부하는 ‘노 프라이드’는 기존의 방식에 격렬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마냥 낭만적으로 보였던 축제에 위기가 닥쳤음은 직접적인 관계자가 아닌 나의 눈에도 선명하다.

 

그래도 나는 우리가 다시 함께할 날이 온다고 믿는다. 아니, 그날을 위해 모두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퀴어퍼레이드에 연대하는 우리의 목적은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키고 ‘나’로서 존중받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어느새 그인 선을 사이에 둔 누군가와 나의 목적은 다르지 않다. 우리가 자신의 존재를 긍정함으로써 ‘자긍심 행진’이 시작되었듯, 서로의 존재를 긍정함으로써 다시 함께 행진할 날을 기약해야 한다.

   

아직 나에게 ‘노 프라이드’와 그 구성원들은 낯설지만, ‘퀴어’ 또한 한때는 나에게 아주 새로운 개념이었던 것을 상기한다. 나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선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야 했다. 타인의 존재를 긍정하기 위해서도 공부가 필요하겠지. 무거운, 그러나 기꺼운 마음으로 새로운 책을 읽어야겠다.

 

 

 

[컬쳐리스트] 박주은.jpg

 

 

[박주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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