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결핍으로부터 작동하는 사유의 문장들 - 김 솔 소설집 ‘말하지 않는 책’

“진리는 문자가 아닌 여백에 담긴다”
글 입력 2023.07.09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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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속한 세계는 어떤 원리로 작동할까? 어떤 형태로 존재할까? 세계 안의 수많은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존재와 삶 그 자체로 증명하고자 했던, 또 수많은 학문의 분야에서 밝히고자 했던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의 답에 이름을 붙여 본다면 그건 ‘진리’일 것이다.


하지만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해서, 또 그것을 부를 수 있다고 해서 그 실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인류는 ‘진리’에 대한 나름의 여러 답안만을 내놓았을 뿐, 정답이 무엇인지 실제로 정답이 존재하는지, 한 가지의 정답만이 존재하는 것인지 조차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답안들을 ‘언어’라는 프리즘에 통과시켜 진리(일 수도 있는 것)를 가시(可視)의 영역에서 드러내고 표현해 왔다. 하지만 그렇게 분류되고 정제되어 ‘말할 수 있는’ 것이 된 진리는 진리에 대한 단서를 품고 있을 지는 몰라도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김 솔 작가의 소설집 『말하지 않는 책』은 이렇게 언어를 매개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된 진리’가 가진 왜곡을 짚어내고, 가시광선의 영역 밖에 있는 비가시 영역의 파장을 포착하듯 정제되고 왜곡된 진리의 파장을 다시 되돌려 혹은 거슬러 ‘진리’라는 것에 다가가 보려는 시도를 담는다. 이는 어쩌면 그의 언급대로 문자가 아닌 여백에서 진리를 찾는 것과 같았다.


 

책은 결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책에게 말을 걸 때만 비로소 책은 대답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책이 대답을 하는 것은 아니고 위대한 책들만 반응을 하는데, 

그 방식은 찰나의 영감과 영원한 침묵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문자에 담기지 않고 여백에 담기기 때문이다. 

 

- p.14

 

 

 

‘선’이 아닌 ‘면’에서 작동하는 불확정성의 세계 : 결핍으로부터 사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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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말하지 않는 책』은 언뜻 당연하게 보이는 세계의 규칙들이 일방적으로 적용되는 세계가 아닌, 좀 더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세계를 상정한다. 즉 우리가 속한 세계를 움직이는 원인과 결과, 주체와 대상, 과거-현재-미래와 같은 개념들이 한쪽에서 한쪽으로 선형의 흐름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선(線)이 아닌 면(面) 안에 공존한다는 것이다.

 

 

만유에 인과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관계가 너무 복잡해서 평범한 인간들은 거의 이해할 수 없을 따름이다.

하나의 원인은 두 개의 결과로 분열된다.

두 개의 결과는 두 개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두 개의 원인은 또 다시 네 개의 결과로 분열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더욱이 결과와 원인은 수시로 자리를 바꾼다.

이런 가역적 연쇄반응은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거의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현재나 미래가 아닌 과거를 바꿀 수도 있다.

그래서 기억은 늘 진실을 배신하는 게 아닐까.

 

- p.38

 

 

그러한 ‘면’의 공간 안에서는 원인과 결과, 주체와 대상, 과거-현재-미래의 순서와 방향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고, 삶과 죽음, 진실과 거짓, 순간과 영원과 같이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개념들도 동시에 함께 존재할 수 있다.


양자물리학 분야의 ‘비결정론적 세계관’을 참고하는 이러한 관점에서, 『말하지 않는 책』은 선형을 띤 관계와 세계에서 벗어나 입체적인 ‘면’의 세계를 그리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한다. 예컨대 시간의 역순으로 기록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거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전혀 새로운 언어를 조어해내고 이를 다시 번역한 내용을 싣는다는 설정, 인과의 구분이나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뒤집는 관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 안에서 이렇게 인과의 법칙이나 시간의 흐름이 일방적으로 적용되지 않은 불확정성의 세계를 ‘낙타의 세계’로 호명한다. 낙타의 세계에서 인과의 관계는 뒤섞여 있으며, 진실은 그 타고난 절대적이고 완전한 특성으로 오히려 도저히 닿기 어려운 것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생과 사의 차이 역시 뚜렷하지 않다.


「낙타의 세계」는 이러한 세계의 성질을 인지하고 ‘진실의 세계’를 갈망해온 ‘나’가 진실과 거짓에 대한 관념을 풀어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물리학 연구자들의 기계장치를 다루는 전기기술자인 ‘나’는 아내와 아들의 죽음의 유일한 목격자에서 단숨에 범인으로 지목되지만, 정작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데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오히려 ‘인간의 세계’에서 진실이 왜곡되는 현상을 관망하며 진실과 거짓이 무엇인지와 같은 본질적인 물음에 집중한다.


 

사유는 결핍이 작동시키는 기능이다. 결핍이 변화를 만들고 변화가 힘을 발산한다.

 하지만 진실에 결핍이 포함돼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으므로

진실의 세계는 한없이 고요하고 육하원칙은 전혀 적용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중언부언하자면, 진실의 세계에서 주객은 곤죽처럼 뭉쳐져 있고

시공간은 끊임없이 교환되며 인과는 짝을 이루어 전개되지 않는다.

그러니 인간은 진실의 세계 밖에서 진실을 원래대로 기억하거나

재현할 수 없는 것이다.

 

- p.96


 

죽음이 진실을 파괴하거나 은닉하는 사건이라면

진실의 세계에선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연결하는 힘이 소멸되는 사건일 뿐이데,

그렇다고 그 힘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우주의 물질과 비물질 속으로 골고루 분산됐다가

또다른 인간의 운명에 관여하는 것이다.

 

- p.97

 

 

낙타의 세계 속 진실과 거짓, 생과 사에 대한 ‘나’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큰 의미를 부여해 왔던 것들이 더 이상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고, 결국 온 삶을 통틀어 우리가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은 세계의 매우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허무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절실히 ‘진실의 세계’를 지향하는 ‘나’의 모습에서 오히려 세계를 대하는 겸허한 태도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이는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하고 복잡한 세계의 진실이나 ‘진리’ 앞에 무력감을 느끼며 자포자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들을 감히 모두 ‘말할 수 있다’고 자신과 타인을 기만하는 것도 아니다. 결핍으로부터 부지런히 사유하고, 세계를 구성하는 동등한 입자로서 타자를 대하며 세계의 비밀을 탐구하는 것이다.


「말하지 않는 책」에서는 조금은 극단적으로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는 ‘마르타 수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진리를 편집하고 왜곡하는 언어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문맹이 되기를 선택하고, 성서를 앞세워 혐오를 부추겨 온 이들의 언어에 침묵으로 답한다. 혐오와 자만은 고통과 파괴를 일으키며 자신과 타인을 태우고 자멸했지만, 마르타 수녀의 사유는 오랫동안 조용히 다른 누군가의 사유와 영감으로 흐르며 변화를 만들어 갔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마르타 수녀는 유일무이한 영웅이나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하고 특별한 존재로 표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사유를 통해 만인과 연결되며, 시간과 인과를 넘어 연결된 그 누구도 마르타 수녀가 될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묘사를 포함하여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사유의 조각들을 곱씹어 보면, 세계 속에서 구분되는 각각의 개체와 중대한 개념들이 더 이상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다. 


즉 불확정성의 세계는 그저 다양한 방향으로 복잡한 영향을 주고받는 입자들의 각기 다른 조합과 연결로 구성되었을 뿐이기에 어느 무엇도 그 누구도 특별하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입자와 원리들이 무가치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인정하는 겸허한 태도에서, 사람들은 보편에서 가치를 찾는 사유의 과정을 부단하게 이어갈 수 있다.


이에 대한 인지를 기반하고 있기에 ‘가가멜의 거품상자’와 같은 실험과 물리학 이론들, 여러 철학 저서와 성서, 예술과 역사를 동원하여 이 책이 풀어놓는 이야기와 사유의 조각들이 난해하기보다는 부지런한 사유와 탐구의 과정으로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선’이 아닌 ‘면’에서 작동하는 세계를 그리고 사유하는 소설집 속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도 ‘특별함’을 부여하는 언어 안에 가둬 두었던 개념들을 다시 돌아보고, 우리가 속한 세계와 서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

 

 

 

비결정론적 세계에서 읽(히)고 쓰(이)는 책


 

소설집의 이야기들은 모두 ‘책’을 중심 소재로 하여 전개되는데, 불확정성을 가진 세계에 대한 관점(비결정론적 세계관)을 ‘책’에 대입하여 풀어놓은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를 통해 책과 독자, 독자와 작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는 책의 모습과 역할에 대해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사회적인 배경이나 자본의 논리 등에 따라 독자의 피드백이 이루어지고, 작가와 독자의 상호작용은 분명히 이루어지기에 그들의 관계를 일방향으로만 볼 수는 없겠지만, 일반적으로 작가는 책을 쓰는 행위를 통해 책 속의 등장인물들을 만들어내고, 이를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그렇기에 독자는 작가에 의해 이미 주어진 내용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설집 『말하지 않는 책』은 기존에 설정된 작가와 독자의 관계, 책과 작가, 책과 독자가 맺는 관계를 더 적극적으로 역전시키고 다른 가능성을 상상한다. 「말하지 않는 책」 속 마르타 수녀의 삶을 기록하는 펠리페 수사는 ‘책을 읽는 순간 책과 독자와 화자와 등장인물과 저자의 운명이 모두 바뀐다’는 금언을 여러 번 떠올린다. 실제로 펠리페 수사의 운명은 자신이 쓴 책에 따라 바뀌며, 그가 써낸 여섯 개의 두루마리는 ‘마르타 수녀’가 누구인지 자체도 바꿔버렸다.


「little boy」는 ‘독자들은 거의 사라지고 작가들만 남은’ 세계에서 자신이 편집한 W회장의 자서전 추천사를 받기 위해 ‘스타 독자’를 설득해야 하는 ‘나’의 이야기가 담긴다. W회장이 직접 지목한 스타 독자 ‘라울’은 가족과 이웃을 잔인하게 살해한 흉악범이었지만, 감옥 안에서 책의 추천사를 쓰고 10여 년 동안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정확히 예측하며 ‘스타 독자’가 되었다. 


라울의 추천사를 받은 책들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작가와 출판사들은 라울의 추천사를 받기 위해서 경쟁했다. 출판업계는 라울을 통해 많은 이익을 창출했고, 수많은 작가들과 책의 운명이 몇몇의 스타독자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따라서 자서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라울의 추천사가 반드시 필요했다. 

 

 

10여 년 전에는 독자들 중 일부가 작가로 변신하기도 했으나

작가의 권위가 크게 줄어들면서 독자들은 더 이상 작가의 자리를 탐하지 않게 됐고,

 현재의 작가들마저 너무 많은 책을 쓰느라 정작 자신의 책조차 제대로 읽지 않자

 지극히 일부 작가들만이 독자로 인정받았다. 독자가 작가보다 존경받게 되면서

작가는 독자로 변태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유충 단계의 존재처럼

여겨졌고, 책은 탈피를 위해 쏟아내야 하는 허물이나 배설물처럼 간주됐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덜 마른 장작처럼 쌓여 있는 책들을 훑어보고 요약해주는

독자들 덕분에 작가들은 표절의 위험을 피하고 창작의 땔감을 손쉽게 얻었다.

수많은 작가들을 거느린 스타 독자들은 출판계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그들은 책 대신 독자를 팔고 있다는 비아냥거림에

격렬히 반발했다. 작가와 독자의 경계가 사라졌다는 단정에도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며, 쓰는 행위와 읽는 행위가 각각 책에 미치는 영향이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자신들을 작가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 pp.65-66

 

 

「little boy」 속 작가와 책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작가들의 사유와 상상이 책의 형태로 독자들에게 팔리는 것인지, 독자들이 그들을 필요로 하는 작가들에게 팔리고 있는 것인지, 그 경계는 모호하다. 이러한 모습은 다양한 매체를 경유하여 수많은 읽을거리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현재에 그리 허무맹랑한 상상으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실제로 책을 포함하여 다양한 사유와 상상의 조각들은 빅데이터와 맞춤형 추천 서비스, 인플루언서들의 추천을 경유하여 쉽게 소비자들의 취향을 ‘저격’하고 심지어 그들의 취향을 만들어 간다. 이를 통해 소비자와 생산의 경계는 쉽게 모호해지고 기존의 취향이나 사상이 더욱 편향될 수 있는 위험도 높아지고 있다.


이렇게 오늘날의 작가와 독자, 책이 직면한 상황은 ‘무엇을 어떻게 읽고 쓸 것인가’라는 질문을 더욱 어려운 문제로 남겨 놓는다. 하지만 한편으로 소설집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책이라는 것이 시간과 인과를 뒤집어 놓고 시간과 뛰어넘을 수 있는, 비결정론적 세계가 지닌 불확정성을 애초에 타고난 것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그렇기에 책이라는 매체가 지닌 이러한 특성을 살피는 것은 비결정론적 세계에서 읽(히)고 쓰(이)는 책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곁에 존재할지,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독자와 작가의 관계, 또 그들과 책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될지를 내다보는 힌트가 될 수 있다. 책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책은 (전혀) 듣지 못한다는 약점을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말을 건다.

진리는 문자에 (거의) 담기지 않고 여백에 (겨우) 담긴다는 진리를

정작 책은 (애써) 외면한다. (결코) 말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책조차도 사실은,

(먼저) 말하진 않겠지만 누군가 (굳이) 말을 걸어온다면

(그 즉시) 대답하려고 (잔뜩) 벼르고 있다. 

 

- p. 305 작가의 말 中

 

 

 

불완전한 ‘언어’를 넘어 :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책은 이러한 특성으로 때때로 시공간의 제약이나 여러 개념들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언어’로 쓰였기 때문에 사유를 오롯이 옮길 수 없는 불완전함을 가진다. 또한 다양한 의도가 개입되어 본질을 가리고 사유의 흐름을 일정한 방향으로만 유도하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소설집 『말하지 않는 책』은 이렇게 언어와 문자의 개입으로 사유가 오히려 오독되고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것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는 과정을 우화를 통해 꼬집어 낸다. 이 과정에서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는 책도 잘못된 해석으로 폐단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고, 인류의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비추는 선전과 국가 폭력의 역사 등을 직접적으로 조명하며 금기를 겨냥하기도 한다. 


「우는 책」은 ‘사자의 나라’에서 공용어를 두고 벌어지는 권력 암투에 한글을 공용어로 추진하려는 대권 주자 ‘존스 박사’가 등장하고 그를 물밑에서 돕기 위해 파견된 한국인들의 이야기가 담긴다. 또한 이러한 모습과는 반대로 영어를 공용어로 추진하려는 가상의 90년대 한국의 모습도 동시에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언급된 다양한 문자가 만들어지는 과정, 공용어에 대한 논의와 정치적 목적의 선전 등 긴 시간의 축을 두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언어의 역사는 곧 정치와 권력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와 정치는 긴밀하게 연결된다. 즉 어떤 목적과 이유를 배경으로 하든 ‘말할 수 있는 것’도, ‘말하지 않는 것’도 모두 권력이 된다.

 

 

그리하여 사자의 나라에는 네 가지의 문자, 즉 아스텍문자, 스페인문자, 차뜰라문자,

 그리고 한글로 쓰인 역사책이 존재하게 됐다. 

'역사 속 모든 위정자들이 정복하기를 갈구하는 가장 넓은 영토란

민중의 무의식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도구가 문자다'라는

문장으로 원고는 시작됐다.

 

- p.133

 

 

그리고 이렇게 정치적인 목적으로 언어를 다루기 위해 쉽게 채택되는 방식 중 하나는 ‘은유’다. 「보이지 않는 왕관을 쓴 독재자」 속 독재자들의 언어를 이를 잘 보여준다. 실제로 한나 아렌트의 저서 속 나치의 언어를 참고하기도 한 그들의 언어는 독재자의 독단적인 결정에 합리성을 부여했고,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자행하는 폭력적인 방식을 그럴듯하게 지우고 정당화했다.


「노래를 들을 때」에 기록된 전쟁과 테러의 현장에서 사용되는 언어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본질을 가리고 적의를 다른 대상으로 돌리는 데 사용되었다. 이렇게 은유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을 때는 너무 쉽게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외면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시공간을 넘어 인간의 역사와 현재 속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은유는 언어의 기능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다양한 문화예술을 가능하게 하고, 권력의 반대편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을 기록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 흘러간 언어의 역사는 권력을 따르기도 했지만, 그것에 맞서 시공간을 넘어 ‘말할 수 없는 것’을 기록하는 매개체로서 그 반대편의 역사를 기록하는 역할도 해온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어가 우리 곁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활용되고 있는지 더욱 면밀히 살펴야 한다. 언어가 생각을 담는 그릇이 될지, 생각을 가두는 틀이 될지는 그것에 대한 충분한 성찰이 있는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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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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